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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8월호 Vol.355

자연을 벗삼아 흐르는 선인의 심상

삶과 노래 사이 ㅣ 단가 ‘호남가’ ‘진국명산’

 

 

 

 

옛사람들이 명지로 삼고 노래를 지어 부르던 자연에서 잠시 쉬어보는 건 어떨까.

그들의 발자취를 차근히 밟다 보면 오랜 역사에 기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

 

우리는 사람·사물·지역 등 무언가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여러 감정을 느낀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다. 예전 경험을 다시금 꺼내 그날의 정서를 또 한번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름을 불러보는 일이다. 노정기와 지명 풀이가 갖는 가장 중요한 기능도 여기에 있다.

‘호남가’를 보라. 많은 지명을 간단한 수식어와 함께 열거했을 뿐이지만, 각각의 지명이 노래되는 것을 듣는 순간 흙다리를 건너고, 꽁꽁 언 강에서 몇 번이고 자빠지며, 노새 등에서 졸다가 떨어지고, 나무 그늘에서 땀을 훔치며, 주막거리의 노파에게서 떡을 사 먹고, 역점에 함께 묵은 사람의 코 고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경험이 돌연 생명력을 얻어 옛사람들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신재효본으로 전해지는 ‘호남가’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함평 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 바라보니 제주 어선 비러타고 해남으로 건너올 제, 흥양의 돋은 해는 보성에 비쳐 있고, 고산에 아침 안개 영광에 둘러 있고, 태인하신 우리 성군 예악을 장흥하니, 삼태육경은 순천심順天心이요, 방백 수령은 진안민鎭安民이라, 인심은 함열이요, 풍속은 화순이고, 고창 성에 홀로 앉아 나주 풍경 바라보니, 만장 운봉雲峯 높이 솟아 층층이 익산益山이요……”

‘호남가’에 나오는 지명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다. 고창高敞은 한자로 풀이하면 지대가 높고 시원하다는 뜻으로, 화자는 번잡한 세속을 떠나 고창성에 높이 앉았다고 말한다. 이때 고창성에서 바라보는 풍광을 나주의 ‘벌릴 나’로 짚어주고, ‘만장 운봉’을 덧붙여 풍광을 더욱 구체화한다. 나아가 운봉이 높이 솟아 층층인 모습을 익산의 ‘더할 익’으로 받는다. 이렇듯 저마다 의미를 갖고 있는 단가의 가사 속 지명을 훑어보며 선인이 거닐던 길을 걸어본다.

 

고즈넉한 자연에 깃든 역사-‘호남가’의 나주

“고창성에 홀로 앉아 나주 풍경 바라보니, 만장 운봉雲峯 높이 솟아 층층이 익산益山이요”

조선 시대 나주는 2개 군과 6개 현을 거느린 도호부로, 목사牧使가 관할했다. 전라도라는 지명이 전주와 나주에서 한 글자씩 가져와 만든 데서 알 수 있듯이, 나주 관아는 호남에서 최대 관청이었다. 신라 말 견훤이 금성 곧 나주에 침입하자, 왕건이 궁예의 수군을 이끌고 가서 세력을 빼앗고 왕비를 취한 일이 있을 만큼, 오래전부터 나주는 군사적·경제적 요지였다. 조선 영조 31년인 1755년에는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의 인사가 나주의 객사 망화루에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붙여 체포되는 괘서 사건이 발생했다. 상업이 발달했으므로 왕권에 저항하는 호민이 근거지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허목許穆은 우리 땅의 풍토에 대해 저술한 ‘지승地乘’에서 나주 사람들은 부유하고 화려함을 숭상하며, 불의에 용감하고 기상이 특출한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호남가’에서 나주를 거론한 것은 아름다운 자연과 물산의 풍요로움 그리고 인물의 흥성거림을 포착했기 때문은 아닐까.

수양대군의 찬탈 이후 방랑길에 오른 김시습金時習은 관동·관서·호남 곳곳에 산수경물시를 남겼다. 시 몇 수는 국가에서 만든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수록됐다. 나주 금성산사錦城山에도 김시습의 시가 있었다. 삼별초의 난이 평정된 후 1277년(충렬왕 3년) 금성산 산신이 무당에게 “진도와 탐라를 평정하는 데 나의 공이 있었으니 정녕공으로 삼아라”라는 요구를 내렸다. 충렬왕은 금성 산신을 정녕공으로 삼고 해마다 제물을 신사에 보냈다고 전해진다. 김시습은 마을 사람들이 산신을 위해 제사 지내는 잔치를 이렇게 묘사했다.

古廟空山裏 옛 사당이 빈 산속에 있어

春風草樹香 봄바람에 초목이 향기롭다.

煙雲增壯氣 안개구름은 봄기운을 더하고

雷雨助威光 우레와 비는 위엄을 더하니,

缶鼓祈年樂 장구와 북으로 일 년 평안을 기원하고

豚蹄祝歲穰 돼지 다리로는 풍년 들기를 빈다.

老翁扶醉返 노인들 취해 부축받아 돌아가고

白酒瀝神床 흰 술은 신당 제상에 흥건하여라.

 

맑은 마음을 향해 유람하다-‘진국명산’의 삼각산

서울의 산들을 노래하는 ‘진국명산’은 곡의 첫머리 “진국명산 만장봉이요”에서 곡명을 따왔다. ‘진국명산’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진국명산震國名山 만장봉萬丈峯이요

청천삭출靑天出 금부용金芙蓉은

거벽巨壁은 흘립屹立하여 북주北走로 삼각三角이요

기암奇巖은 두기?起 남안南岸 잠두蠶頭로다.

고지도에 보면 삼각산은 서울의 주산으로 도드라지게 그려져 있다. 서울은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타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목멱산(남산)으로 둘러싸인 내명당이 도성을 이루고, 바깥으로 북쪽의 삼각산(북한산), 동쪽의 용마산, 서쪽의 덕양산, 남쪽의 관악산이 외명당을 이룬다. 삼각산이라는 명칭은 세 봉우리 백운대?인수봉?만경대가 주축으로 삼각을 이루고 있어 붙여졌다. 삼각산 유람은 창의문을 나와 탕춘대에서 시작하는 방식과 동소문을 거쳐 조계동에 들어가 조계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석가령을 넘는 방식이 있다. 이익李瀷은 조계사에서 하루 쉬고, 석가령을 넘어 삼각산을 조망했다.

조선 중기 문장가 이정구李廷龜는 1603년(선조 36년) 9월 15일 삼각산을 유람하고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를 지었다. 당시 그는 금강산에서 돌아왔으나 한 해가 넘도록 예조에서 국가 통치나 외교와 관련한 문장을 짓느라 골몰해야 했다. 그래서 연거푸 세 번 글을 올려 사직을 청했다. 그때 중흥사의 승려 성민이 편지를 써서 보냈다. “산속에 늦서리가 내렸습니다. 단풍잎이 정말 붉답니다. 며칠 지나면 시들고 말 것입니다. 뜻이 있으시면 한번 오시지요.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이정구는 간단한 행장을 갖췄다. 삼각산 유람은 ‘표연히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바람을 충족해줬다.

이덕무李德懋도 ‘유북한산기遊北漢山記’를 남겼다. ‘유북한산기’엔 세검정·소림암·문수사·보광사·태고사·용암사·중흥사·서암사 등에 대한 감각적인 글이 묶여 있다. ‘세검정’에서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고 있노라니 물소리가 옷과 신을 스쳐간다”라는 대목을, ‘서암사’에서 “바람이 일으키는 여울 소리와 솔숲에서 이는 소리가 텅 빈 가운데 음운音韻을 만들어내는데, 쏴쏴 소리가 빗소리 같아서, 마주 보고 말을 나누어도 말소리를 분별할 수가 없을 정도다”라는 대목을 남겼다. 지금 한여름에도 삼각산에서 이런 명랑하고 쾌활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지명을 열거하며 듣는 이의 추억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단가의 힘은 ‘호남가’와 ‘진국명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호남가’를 들으며 옛사람의 휴가지 정경을 또렷이 연상할 수는 없다. 지명 풀이에는 무언가 흥분할 만한 사건, 돈 주고 산 해악 없는 모험, 미리 알아둔 맛집을 찾아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노래를 통해 역사적 공상을 하며 안온한 기분을 느낀다.

‘진국명산’은 서울의 지명을 노래해 서울을 좀 더 의미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사람에게 삼각산은 ‘고향의 산’이다. 병자호란 직후 김상헌金尙憲이 척화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라고 애절하게 노래했다. 서울에서 생활하지 않는 사람들도 삼각산은 도성의 진산으로서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올해 여름, ‘호남가’와 ‘진국명산’을 들으며 선인이 지역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이유를 상상해본다.

 

심경호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그림 정윤미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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