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네비게이션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빠른예매 바로가기 사이트 지도 바로가기
월간미르 상세

2019년 08월호 Vol.355

성모 승천을 재연하며 역사의 맥을 잇다

전통 예술 기행 ㅣ 중세 종교극 ‘엘체의 신비극’

 

 

 

 

매년 8월, 성모 승천을 연극으로 선보이는 도시가 있다.

성당과 거리엔 시민의 열띤 연기와 몸짓이 가득하다.

 

엘체Elche는 스페인 3대 무역항인 알리칸테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위치해 있는 교통의 요지다. 따라서 발렌시아 지방에서 발렌시아, 알리칸테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며 항상 수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엘체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엘체의 신비극Misteri d'Elx과 야자나무 숲으로 유명하다. 2000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야자수림 경관은 8세기 이베리아반도에 침입한 아랍인들이 대추야자 나무를 북아프리카에서 들여오면서 시작됐다. 엘체의 신비극이 공연되는 산타 마리아 성당 꼭대기에서 야자나무 숲을 내려다보면, 500헥타르에 걸쳐 20만 그루의 대추야자 나무가 거대한 오아시스를 이루고 있는 장관이 펼쳐진다. 나무들이 30미터 이상 쭉쭉 자라 드넓은 오아시스를 가꿀 수 있었던 것은 중세 시대부터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한 엘체의 관개시설 덕분이다. 이처럼 아랍인의 영향이 농후하게 남아 있는 엘체에 성모 승천일을 기념하는 기독교 행사가 긴 세월 이어져올 수 있었던 이유는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짐작할 만하다. 1492년 페르난도 국왕이 이슬람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키며 국토회복운동을 마무리하자, 아랍인들이 추방되고 엘체는 인구 부족으로 쇠퇴한다. 그러나 2세기가 지난 후, 신발 산업의 발달로 엘체가 스페인에서 신발 공장이 가장 많은 도시 중 하나로 자리 잡으며 다시 번영기로 접어들었다. 엘체 시민들은 오랜 기간 기독교도와 무어인의 치열한 접전 지역이던 이곳에 기독교 사상과 교리를 굳건하게 세우기 위해 성모 승천일에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종교극을 시행해오고 있다. 이 공연은 스페인어가 아닌 발렌시아어(아라곤 왕국의 언어인 카탈란어의 방언)로 진행되는데, 엘체의 주민들은 이 같은 행사를 매년 반복하면서 정신적·종교적·언어적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시민의 참여로 대를 이어온 공연

엘체의 신비극은 8월 15일 성모 승천일 즈음에 성모 승천 풍경을 재연하는 극이다. 내용상 라 베스프라La Vespra와 라 페스타La Festa로 구분된다. 이에 따라 연극도 이틀에 걸쳐 공연되는데 8월 14일은 성모 승천의 전야제로 사도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하는 성모 마리아를 보여준다. 천사가 성모의 죽음을 야자나무 잎으로 알리고, 성모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을 준비한다. 여호사밧 골짜기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성모가 죽음을 맞이하면 사도들은 촛불을 켜고 성모의 부활을 기다린다. 천사들이 성모의 영혼을 이끌고 천상으로 올라가면 사도 요한이 성모의 몸 위에 승천의 길을 상징하는 석류나무 가지를 내려놓는다. 8월 15일의 극은 장례식·승천·대관식의 플롯을 갖춘다. 성모의 장례식에서는 장례식을 방해하던 이교도들이 기적을 경험한 뒤 개종해 세례를 받고 함께 찬양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장례가 끝나면 성부 하나님이 내려와 승천하는 성모에게 관을 씌워주는 대관식이 펼쳐진다. 성모의 부활을 약속하는 천사들의 찬양과, 사도들의 열띤 찬양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시민이 참여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만큼, 매년 8월 초에는 시민을 대상으로 배우를 뽑는 오디션이 열린다. 신비극에서 노래 부를 배우를 선정하는 목소리 테스트가 시행되기도 하고, 예배당에서 천사 테스트를 진행하기도 한다. 천사 테스트란, 어지러움을 잘 견디는 아이들을 선발해 신비극 중 천장에서 땅으로 하강하는 천사 배역을 주는 오디션이다. 엘체의 신비극 관람은 무료지만, 내용을 자세히 접하고 싶다면 공연 직전에 3일간 진행하는 리허설을 보는 것이 좋다. 정식 공연과 다르게 리허설을 보려면 56유로 정도의 돈을 지불해 입장권을 구매해야 한다. 짝수년은 10월 29일과 30일, 그리고 11월 1일에 엘체의 신비극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

엘체의 신비극은 성당 안에서만 열리는 종교극이 아니다. 수백 명의 시민이 성모 마리아의 장례 행렬을 따라 거리를 돌아다닌다. 장례 행렬은 촛불을 들고 마리아의 죽음을 애도하며 성모 마리아상의 뒤를 따른다. 성당과 거리가 무대가 되는 셈이다. 배우뿐 아니라 무대의 스태프도 시민이 직접 맡아 한다. 3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매년 참여해 배우·가수로 활동하거나 무대 설치·분장 등을 돕는다. 엘체의 신비극은 거의 모든 시민이 참여하며 발렌시아의 문화 및 언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행사로 발전했다. 1931년 국가기념물로 지정된 엘체의 신비극은 공연예술과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다.

그중 공연예술 측면에서 무대를 살펴보면 엘체의 신비극 무대는 중세의 종교극 특성을 잘 살린 구조다. 중세 종교극의 무대는 천상과 지상으로 이뤄져 있다. 특히 엘체의 신비극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이어지는 무대장치를 통해 성모 마리아의 영혼과 육체가 부활하는 장면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하늘Cielo’이라는 장치는 커다란 리넨 천으로 천장을 만들어 하늘을 보여주는 동시에 성모가 공중으로 승천하는 데 사용되는 무대장치를 숨기는 기능을 한다. ‘하늘’은 1530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다. 예배당 정문과 제단을 연결하며 건물 전체에 걸쳐 길게 뻗어 있는 복도 ‘코리도르Corridor’도 인상적이다. 이 복도는 지상과 천상 사이의 소통을 허락하는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류의 영적인 여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성모 마리아 역시 이 길을 여행하게 되고 기독교의 이상인 예수의 고난을 경험하기에 이른다. 엘체의 신비극은 14~15세기경 매해 8월 산타 마리아 바실리카에서 공연됐고, 2001년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17세기 초반 엘체의 역사를 연구한 크리스토발 산스는 1276년 엘체에서 신비극이 시민에 의해 공연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였는데, 아라곤 왕국의 정복자 하이메 1세가 엘체를 정복한 뒤 1265년 엘체 시민들이 신비극에 관한 아이디어를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신비극의 가장 오래된 음악이 무어인의 정복하에 살아가던 기독교도인 모사라베 양식의 음악이라고 전해진다. 모사라베 성가는 아랍 이슬람 세력의 지배가 끝나는 시기까지 이베리아반도의 중심적인 성가 양식이었다. 11세기경 부르고스 종교회의가 스페인 교회로 하여금 로마 가톨릭교회의 그레고리오 성가를 따르도록 명령할 때까지 스페인 중세음악의 중추 역할을 했다.

19세기 후반 역사가들의 견해는 문학·연극·음악·언어 전반을 분석했을 때 신비극은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초반에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오늘날과 비슷한 형식을 갖춘 진정한 의미의 신비극은 15세기 중반 이후 출현했다는 의견에는 학자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다.

 

함께 기뻐하고 저항하며 지켜낸 전통

매해 8월 15일에 성모 승천을 기념하는 행사는 세상 종말에 우리 몸이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예견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성모 마리아가 지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승천하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교리다. 14세기에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다룬 자료가 발견되는데, 그 자료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채 그의 제자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는 말이 적혀 있었다.

1950년 11월 1일, 교황 피우스 12세는 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육체와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교리라고 밝혔다. 나아가 성모 승천의 교리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이는 가톨릭 교리와 믿음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자라고 단언했다. 성모 승천은 비록 성서에 기록돼 있지 않지만 성모의 역할, 성모와 그리스도와의 관계, 교회 안에서 성모의 위치 등으로 받아들여진 신학적 결론이다. 6세기경에는 성모의 죽음과 승천을 기념하는 날을 도르미션Dormition(일시적인 잠에 떨어짐)으로 불렀다. 8세기경에 축일이 8월 15일로 확정되면서 ‘마리아의 승천’으로 바꿔 부르게 됐다.

엘체의 시민들은 중세부터 성모 승천일마다 신비극 공연을 치렀다. 이 공연은 성모 마리아의 승천과 부활을 같이 기뻐하는 일이기도 했고, 밀려오는 외세 문화와 종교에 맞서면서 자신들의 언어와 종교를 지켜내는 저항의 과정이기도 했다. 엘체의 신비극이 오늘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서 의미를 갖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언어적인 면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의 참여다. 엘체의 신비극 원고가 라틴어가 아닌, 발렌시아 언어로 돼 있다는 점은 엘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증거라 여겨진다. 또한 엘체 시민 대부분이 참여하는 종교극이라는 점에서도 보존의 가치가 충분하다. 중세 기독교 신앙을 생생하게 재연하는 연극을 통해 선조의 전통 신앙을 자자손손 대를 이어 보전하려는 엘체 시민의 끈끈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임주인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교 M.Phil 과정을 수학했다. 역서로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 ‘맨해튼의 고깔모자 소녀’가 있다.

사이트 지도

사이트 지도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