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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6월호 Vol.353

국립국악관현악단 이상준

예술가의 초상

“악기는 연주자의 성격과 같이 가는 것 같아요. 피리는 소리가 크고 파워풀한 악기죠.

제 성격도 직선적이고 진취적이거든요. 다른 악기로 시작했더라도 저는 결국 피리로 왔을 거예요.”

 

 

 

‘B형 곱슬머리 남자’ 이상준은 피리 같은 남자였다. 관현악단에서 가장 작은 악기지만 가장 큰 소리를 내며 무대를 주도하는 피리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말부터 거침없이 쏟아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위해 저돌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예전엔 학생들이 피리를 기피하기도 했죠. 솔직히 ‘폼’이 안 나잖아요. 자세만 잡아도 멋있는 대금·해금·가야금에 비해 피리 연주자는 ‘개구리 같다’는 소리도 듣고.(웃음) 그래도 이제 악기가 많이 진화해서 예전에 비해 연주가 편해졌어요. 국악기란 게 전반적으로 소리 내기가 힘들긴 해요. 소리 내는 게 거의 반이죠. 서양 악기와 달리 가공되지 않은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쓰니까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리코더 대신 단소를 가르친 담임 선생님 덕분에 국악에 입문한 그는 사실 처음엔 대금에 관심이 있었다. 피리를 선택한 건 신체적인 핸디캡 때문이었다고. ‘피리 소리에 홀렸다’거나 ‘나도 모르게 끌렸다’는 식으로 포장할 수도 있을 텐데, 그는 솔직했다.


“서양 악기는 웬만하면 누구나 연주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는데, 국악기는 그런 면에서 좀 아쉽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넘어간 게 피리예요. 하지만 대금으로 시작했더라도 결국 피리로 왔을 것 같아요. 듣는 사람이나 연주자나 자신을 닮은 악기를 좋아하기 마련이거든요. 대금이 앞에 나서기보단 뒤에서 융화하는 성격이라면, 저는 직선적이고 저돌적이거든요. 딱 피리죠.”


가장 좋아하는 피리곡이 어떤 곡이냐 물으니 역시 직선적으로 “내 곡들이 제일 좋다”라고 답한다. 자신이 위촉해 만든 대피리 협연곡들 얘기다. 사실 그는 북한의 개량 악기인 대피리와 저피리를 한국에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0년대 초반, 국립국악관현악단이 ‘겨레의 노래뎐’이라는 시리즈를 무대에 올릴 때 대피리를 접한 그는 이후 틈나는 대로 일본에 건너가 대피리를 배웠다. 북한 악기를 그대로 가져올 수 없어 3년에 걸쳐 리드를 개량해 한국적 색깔을 입혔다.


“사실 전통 향피리의 경우 낼 수 있는 음정에 한계가 있거든요. 북한은 분단 이래 악기를 전면 개량했지만 우리가 고수한 전통 악기는 단선율을 위한 악기라 화성을 만들기 어려워요. 악기 음역에도 제한이 있죠. 그런 점에 갈증이 있었어요. 저는 음악을 들을 때 저음을 중요하게 듣는 편이거든요. 서양 관현악에 혼·튜바 등의 저음 베이스 악기가 많은 것에 비해 국악 관현악은 베이스 악기가 부족한 것이 아쉬웠어요. 그래서 대피리에 접근한 것이죠. 하지만 북한 것을 그대로 연주할 순 없으니 피리의 서(리드)를 활용해 중화 작업을 했어요.”


지금은 전국의 국악 관현악단에서 대피리 포지션이 정착 단계에 이르렀지만 초창기엔 ‘뼈아픈’ 기억도 많다. 전통 향피리 연주자들에게 배척도 당했고, “클라리넷 같다”라는 비판도 들었다. 한양대학교에서 피리 전공을 했지만 중앙대학교로 옮겨 석사 과정을 다닌 것도 피리 연주자로서 대피리 연주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 간다는 게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대피리를 배우기 위해 연가 내고 사비 들여 갔죠. 일본에서 배우는 건 한계가 있고 한국에선 대피리를 배울 수가 없으니 중앙대학교에서 클라리넷과 매칭해 공부해야 했어요. 초기에 향피리 연주자들은 대피리 연주를 거부했죠. 지금은 오히려 그게 고마워요. 제가 안일해지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하도록 채찍질해준 셈이니까요. 이제 다른 국악 관현악단에서도 70~80퍼센트 정도 대피리 포지션이 있으니 인정받는 단계인 것 같아요. 하지만 더 확실하게 정착됐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양방언과 국립국악관현악단-Into The Light’는 그에게 “행복한 공연”이었다. 이례적으로 대피리 4대, 저피리 2대가 추가돼 베이스 파트가 완전히 독립한 것이다.


“양방언 선생님의 음악이 제가 추구하는 스타일과 비슷해요. 현대적인 음악이지만 내면엔 우리 장단을 깔고 있거든요. 오케스트레이션의 다양한 변화도 행복했고요. 저는 대피리에 애착이 많기 때문에 저음 피리 파트가 독립하는 걸 원하거든요. 다양한 오케스트레이션이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존재 이유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저더러 튄다고들 하는데, 새로운 것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아요. 새로움이 없는 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피리처럼 진취적이고 저돌적인 남자
악기 개량뿐 아니라 음악적 현대화에 대한 뚜렷한 의지를 가진 그는 국립국악관현악단 외에도 다양한 활동에 욕심을 내고 있다. 2010년 국내 최초로 동서양 관악기를 융합한 오케스트라 ‘한음윈드오케스트라(이하 한음)’를 만든 것도 그래서다.


“예술의전당에서 프랑스 군인 악단 80여 명의 윈드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을 보고 무척 부러웠어요. 우리는 왜 관악 오케스트라가 없을까 생각해보니 악기군이 대금과 피리밖에 없더군요. 양악기는 수십 개가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고민 끝에 전통 악기군과 개량 악기군, 서양 악기군까지 묶어서 한음을 만들었어요.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외부의 도움도 받아야죠.”


한음의 예술감독이자 상임지휘자인 그는 한음을 더 잘 이끌기 위해 지휘까지 따로 공부했다. 대피리 공부를 위해 중앙대학교에서 석사를 마치고 나서, 지휘 공부를 위해 또다시 전북대학교로 방향을 튼 것이다.


“하고 싶은 음악 때문에 이 학교 저 학교 다니게 됐어요. 지휘 욕심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한음을 이끌기 위해서였죠. 대중과 소통하는 음악을 하려면 직접 지휘봉을 잡아야 했어요. 음악적 욕심을 위해 조직을 만들고, 지휘도 하게 된 겁니다.”


한음이 추구하는 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감각이다. 전통은 물론 대중과의 소통, 전통의 현대적 개량이 다 소중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연 레퍼토리도 늘 세 가지 챕터로 나눈다.


“한쪽으로 치우치는 순간 관객의 호불호가 나뉘잖아요. 양면성이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골고루 소통할 수 없죠. 제가 요즘 관심 있게 본 방송이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트롯’이에요. 거기서 송가인 씨가 부른 트로트에 판소리 시김새가 나오는데 그게 좋더라고요. 저는 그런 것에 대찬성입니다. 일반인에게 조금씩 접근해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적 전통을 대중문화 속에 조금씩 가미해가다 보면 문이 열리게 돼 있거든요. 불과 7~8년 전만 해도 민요에 대한 인식이 낮았지만, 송소희 씨가 나오고 나서 확 달라졌잖아요. 그 친구가 대중이 원하는 색깔을 잘 살린 덕분이죠.”


관악 오케스트라가 끝이 아니다. 최근엔 밴드까지 결성했다. 지난해 창단 공연을 한 ‘놀터 밴드’는 민요의 현대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이 쉽지 현대화란 게 엄청 힘든 일이죠. 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국악도 맞춰 가야 해요. 그래서 놀터 밴드를 만들었어요. 기준은 민요인데, 예컨대 민요 ‘군밤타령’을 모티프로 리듬과 선율을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 요즘 사람들 취향에 맞출 수 있거든요. 저는 전통에 새옷을 입혀서 지금에 맞는 음악을 보여주는 게 현대화라 생각합니다. 이질적으로 추상적인 현대음악이 아니라 기존의 전통 곡에 지금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는 색깔을 입히는 게 제가 추구하는 바죠.”


올해부터는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함께하는 관객음악학교 ‘아마추어 관현악단’ 지휘까지 맡아 6월 공연을 앞두고 있다.
“아마추어 관현악단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적극 지지했어요. 아마추어들이 우리 음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미래의 관객과 소통의 창구가 하나 열리는 셈이죠. 올해 지휘를 맡아 보니 연령층이 생각보다 낮아서 깜짝 놀랐어요. 국악을 좋아하는 일반인이라면 으레 연령대가 높을 줄 알았는데 20대 대학생도 많더군요. 다양한 연령의 일반인이 뮤지션과 스킨십을 하면서 마니아로 변해갈 수 있기 때문에 소중한 프로젝트라 생각해요.”


아마추어 관현악단은 매년 오디션을 통해 40~50명을 선발하는데, 국악을 배워본 적 있는 아마추어들의 호응이 매우 열정적이다. 수료 후에 스스로 악단을 꾸려 활동을 이어가기도 한다.
“저는 이런 게 현대화라고 봐요. 우리가 계속 이런 콘텐츠를 만들어야 국악인들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겠죠. 이제 연주자가 공연만 하던 시대는 지났어요. 체험이 결부돼야 하죠. 서양 오케스트라를 보면 연습 과정에 학생들이 참관하는 프로그램도 공연 관람 패키지에 포함되거든요. 그래야 단체도 지속적인 관심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국립국악관현악단이다.
“시대 변화에 맞춰서 어떤 음악도 거부하지 않고 편협하지 않게 모든 장르를 넘나들고 있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무척 자랑스럽고, 거기 몸담고 있어 행복합니다. 저의 외적인 음악 활동도 다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동기부여를 받았어요.”


피리처럼 진취적인 남자 이상준. 그의 활동은 어디까지 확장될까. 가장 작은 악기 피리에서 상상할 수 없는 큰 소리를 내는 것처럼, 그의 가능성도 쉽게 가늠할 수 없을 것 같다.

 

유주현 ‘중앙SUNDAY’공연 담당 기자.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사진 人, The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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