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수에서 안무가로의 발돋움 ‘넥스트 스텝’.
그 도전적 발걸음에 함께하며 안무가로 변신한 박기량과 황태인.
‘넥스트 스텝 II’는 그들의 치열하고 날 선 고민이자 도전이었다.
2019년 4월 25~27일 |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지난해 차세대 안무가 발굴을 위한 국립무용단의 창작 프로젝트 ‘넥스트 스텝 I’을 통해 국립무용단원 정소연·김병조·이재화가 작품을 발표했다. 이 중 이재화의 ‘가무악칠채’는 레퍼토리로 개발돼 다시 한번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2019년 ‘넥스트 스텝 II’는 창작 오리엔테이션과 심사를 통해 선정된 두 단원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박기량과 신예 황태인이다. 두 사람은 매우 다른 성향의 무용수이자 안무가지만, ‘한국 전통춤에 기초한 현대적 해석과 창작’이라는 공통된 방향성 안에서 각자의 주제와 메시지, 스타일을 찾아 신작을 선보였다. 이번에는 연출가 고선웅과 무용평론가 장인주가 기획 단계에서부터 무대화되는 전 과정에 자문으로 참여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조력자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느리지만 강하게 증폭되는 움직임의 파장, ‘무무’
황태인은 베테랑 단원 3인과 함께한 작품 ‘무무’를 선보였다. 2016년 입단한 신입 단원을 안무자로 선정한 것은 다소 파격이었다. 다양한 작품에서 무용수로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그는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주최한 ‘2017 신진국악실험무대: 춤으로의 여행’에서 살풀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차세대 안무가로 주목받은 데 이어 이번 ‘넥스트 스텝 II’에 선정되며 안무가로서의 영역을 빠르게 넓혀가고 있다. 국립무용단 입단 이전에도 안무 경험이 있는 그는 2015년 ‘젊은 안무자 창작공연’ 출품작 ‘Can I talk about us?’에서 춤을 추는 이유와 열정을 진솔하게 풀어냈고, 2016년 상명아트센터에서 공연한 ‘사이(춤벗, 판)’에서는 장구 장단 안에서 살풀이와 소고춤을 조화시켜 관객 평가 1위를 차지했다. 지난 작품이 모두 자신의 끼와 신명, 춤집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젊은 무용수의 정제되지 않은 생생한 에너지로 채워낸 것들이라면 이번 작품에서 그는 전혀 다른 이성적 모습을 보여줬다.
‘무무’는 우리 춤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미적인 가치를 점·선·면과 같은 조형 요소에서 찾고자 했다. 작품명은 없을 ‘무(無)’와 춤출 ‘무(舞)’를 더한 것인데, 무(無)의 상태에서 점과 선으로 시작된 고요한 움직임들이 점차 양감을 더해가며 실체를 가진 역동적인 춤(舞)으로 완성돼가는 과정을 그렸다. 서사나 극적 표현 없이 무용수들의 움직임만으로 무대 위에서 점·선·면이 완성돼가는 과정을 감상할 수 있는 회화적 작품이다. 백색의 무대에 한복과 버선, 부채 등이 오브제로 등장해 전통적 색채를 더했고, 거문고 연주자 박우재의 라이브 연주는 소리뿐 아니라 무대 한 편을 채운 작품의 일부로 작용했다. 흑백 대조 속에 매우 추상적이며 미니멀한 이미지다.
작품은 네 개의 작은 큐브에 비춘 조명으로 네 점을 상징하며 시작한다. 네 명의 무용수는 각기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움직이는데, 절제된 정갈함을 보여준다. 신체 일부로 점을 만드는 이 과정은, 무표정하지만 무심한 것이 아니라 극도의 긴장을 컨트롤하고 있다. 예를 들어 두 손을 모으고 고요히 서 있는 조용진의 발을 보면 왼발 뒤꿈치가 들린 채 미동 없이 중심을 잡고 있고, 발끝으로 선 황태인과 조승열도 느린 회전판 위에 선 것처럼 흔들림 없이 방향을 바꿔낸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춤 고수의 호흡을 보여주려 한 황태인의 전략이 어느 정도 적중하는 장면이다. 하얀 캔버스의 천을 찢어 남은 면에 먹으로 점에서 선을 만들면 이내 무대 곳곳에 점과 선, 면이 산재한다. 평소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던 점·선·면이 무대 어디에든 있음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춤이 각자의 것으로 진행된 ‘무무’는 획일화된 동작에 무용수를 끼워 넣지 않음으로 더욱 성숙한 컨템퍼러리 색채를 띠게 됐다. 작은 동작으로 시작해 느리게 증폭되는 움직임은 라벨의 ‘볼레로’처럼 눈치채기 어려운 상승 그래프를 그렸으며, 작품의 절정은 흰 캔버스에 먹으로 굵은 선을 긋는 엔딩이다.
면을 넘어 공간을 탐닉하는 후반의 입체적 춤은 무용수들의 깊은 내공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조용진은 어느 작품에서 봐도 믿음직스러운 국립무용단 에이스이며, 등장만으로 무대를 채우는 김미애의 존재감은 작품에 신뢰를 더했다. 과거 한껏 춤을 춰야 제 성에 찼던 황태인이 이렇게 많은 것을 비워낸 것은 놀라운 변화다. 이번 작품은 어쩌면 새 스타일을 찾은 것이거나 여러 시도 가운데 하나였을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훗날 황태인의 성장에서 중요한 기점으로 꼽힐 작품이라는 것이다.
한국춤의 무거움에 반기를 든 도발적 무대, ‘봄(printemps)’
박기량의 ‘봄(printemps)’은 전통 씻김굿을 소재로 일곱 명의 여성 무용수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제목인 ‘봄(printemps)’은 안무자 박기량이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동하던 중, 긴 겨울 끝에 내리쬐는 봄 햇살을 보고 영감을 받아 정했다고 한다. 무용수들은 동서양 무속과 신화 속 인물을 상징했는데, 길흉을 점치는 ‘무당’, 자손과 수명을 관장하는 ‘제석신(帝釋神)’,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 등 다채로운 여신의 모습으로 생명과 잉태, 한과 죽음을 그려냈다. 자연의 경이와 신의 등장을 다루지만 작품이 말하는 것은 인간 삶의 아름다움이고, 계절의 순환을 통해 본 삶의 윤회, 그리고 사랑이다.
박기량은 2009년 국립무용단 기획 시리즈 ‘바리바리 촘촘 디딤새’에서 씻김굿을 축제로 표현해낸 ‘축제’를 안무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씻김굿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이어왔고, ‘봄(printemps)’ 역시 움직임과 오브제는 씻김굿에서 영향을 받았다. 씻김굿에서 영혼을 저승으로 천도하기 위해 죽은 이의 몸을 상징하는 물건을 씻기는 절차를 샤워하는 동작으로 표현하는 등 작품 곳곳에 씻김굿의 흔적이 담겨 있다. 박기량은 씻김굿에 대한 정보 없이 관람하더라도 안무 의도를 느낄 수 있길 바랐고, 동서양에 모두 존재하는 생명과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연결해 관객의 동의를 얻고자 했다. 예를 들면 서양 신화 속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땅이 생명을 잉태하는 길인 동시에, 한국의 씻김굿에 등장하는 저승을 향한 ‘길 닦음’의 길로도 그려질 수 있다는 설정이다. 다만, 이렇게 복잡한 구조는 그만큼 춤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워 관객 입장에서는 안무 의도를 미리 듣지 않으면 뜻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삶과 죽음을 오가는 역동적인 순간을 극대화하기 위해 바퀴가 달린 슬라이딩 오브제를 타고 다닌다거나, 감정과 기억의 매듭을 표현하기 위해 밧줄을 타고 오르는 장면은 시각적으로 흥미롭지만 의미 전달 면에서는 아쉬웠다. 춤 공연은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건넨 우물가 여인처럼 그 뜻을 설명할 기회를 따로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마실 물에 뜬금없이 떠 있는 잎을 볼 뿐이다. 이번 작품에 아쉬움이 남는 또다른 이유는 음악과 춤의 연결에 있다. 일렉트로닉 기타 사운드와 이디엠(EDM) 음악은 시각적 요소들과 어색한 조화를 이뤘다.
그럼에도 ‘봄(printemps)’은 무용수들의 뛰어난 기량이 잔상으로 남을 만큼 인상적인 연출을 보여줬다. 짧은 저고리와 속바지 차림으로 관능미를 강조하고, 여성의 몸과 움직임 특성에 집중해 여성적이며 유미주의적인 시각을 보여주었다. 늘어뜨린 밧줄의 수가 늘어나고 붉은 조명 아래서 여인들이 밧줄을 엮으며 몸부림치는 장면은 작품의 절정을 그렸고, 슬라이딩 보드를 탄 여인들은 철없는 소녀들처럼 미소로 인사를 건네며 작품을 끝맺었다.
‘봄(printemps)’은 예측을 뛰어넘는 과감한 전개와 표현, 판타지적 연출에서 마치 원시 버전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는 것만 같았다. 뜻밖의 전개와 거침없는 표현으로 한국춤의 무거움에 반기를 든 도발적 무대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국립무용단은 2001년 ‘바리바리 촘촘 디딤새’를 시작으로 ‘동동 2030’ ‘The NTOK Choice’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안무가 발굴에 힘써왔다. 초기에는 소규모 워크숍 형태의 공연이나 무용수 개인의 스타성에 초점을 맞춘 공연을 선보였기 때문에 안무가를 지속해서 육성하고, 작품을 개발해 레퍼토리로 정착시키기에 한계가 있었다. 이전의 시행착오를 발판 삼아 국립무용단의 실정에 맞게 설계된 ‘넥스트 스텝’은 발표된 작품을 레퍼토리화하는 가능성도 폭넓게 열어두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무용수에게 개인 작품을 공연할 기회로 무대를 제공하던 기존 기획과는 차별화된다. ‘넥스트 스텝’에 선정된 안무자는 워크숍, 기획·제작 스태프들과의 지속적인 회의, 외부 자문을 통해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든다. ‘넥스트 스텝’이 지리 킬리안의 무용수이던 나초 두아토를 발굴해 세계적 안무가로 키워낸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의 프로그램처럼 국립무용단원들의 잠재력을 깨워주는 기획이 되길 바라며, 많은 부분에서 생산적 의미를 갖는 ‘넥스트 스텝’의 다음 걸음에 기대를 가져본다.
글 김예림 무용 평론가. 1977년부터 발레와 현대무용을 전공했고, 무용수와 안무가, 무용단 대표, 기획자를 거쳐 2007년 평론가로 등단했다.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무용에 관련된 다양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