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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4월호 Vol.351

저마다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 향기로이 세상을 채운다면

삶과 노래 사이┃시조 '모란은 화중왕이요'

모든 꽃은 고유의 결과 향을 지닌다.

활짝 피어난 모양과 모진 환경을 버텨내는 자세는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세상을 향기롭고 아름답게 만든다. 이는 사람의 삶과 무척 닮아 있다.

 

 

 

김수장(金壽長)이 지은 시조 ‘모란은 화중왕이요’는 여러 꽃이 나열되는 단순한 구성의 작품이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이 편 ‘고시조 대전’에 따르면 이 시조는 58개 가집에 실려 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관심을 받아온 작품이다. 다만 가집마다 가사가 조금씩 다른데 오랫동안 널리 불리다 보니 등장하는 꽃과 꽃이 가진 성격이 달라졌다. 먼저 ‘병와가곡집’에 실린 ‘모란은 화중왕이요’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모란(牧丹)은 화중왕(花中王)이요 향일화(向日花)는 충신(忠臣)이로다
연화(蓮花)는 군자(君子)요 행화(杏花)는 소인(小人)라 국화(菊花)는 은일사(隱逸士)요 매화(梅花)는 한사(寒士)로다

박(朴)꽃은 노인이요 석죽화(石竹花)는 소년이라 규화(葵花)는 무당이요 해당화(海棠花)는 창기(娼妓)로다
이 중에 이화(梨花)는 시객(詩客)이요 홍도벽도(紅桃碧桃) 삼색도(三色桃)는 풍류랑(風流郞)인가 하노라

 

이 시조에 나오는 꽃은 전부 어느 특정한 인물을 비유하고 있는데 가집마다 의인화된 인물이 일부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해동가요’의 주시경본에서는 “모란은 화중왕이요 향일화는 충효로다 / 매화는 은일사요 행화는 소인이요 연화는 부녀요 국화는 군자요 동백화는 한사요 박꽃은 노인이요 석죽화는 소년이요 해당화는 간나희로다 / 이 중에 이화는 시객이요 홍도 벽도 삼색도는 풍류랑인가 하노라”로 기록돼 있다.


차이점을 살펴보면,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구간은 중장이다. ‘병와가곡집’은 꽃들 중 연화부터 나열하지만 ‘해동가요’에선 매화가 처음 등장한다. 더불어 연화?국화가 의미하는 인물이 서로 다르다. 군자를 의미하는 꽃이 전자에선 연화, 후자에선 국화다. 연못을 뚫고 올라와 피는 연꽃과 오상고절(傲霜孤節)을 상징하는 국화 모두 군자와 잘 어울린다. 한사는 각각 매화와 동백으로 표현됐는데 가난한 선비의 모습이 눈 속에 피는 두 꽃과 닮았다. 또 전자에서 규화를 무당이라 했으나 후자에는 생략돼 있다. 한편 이화(梨花)의 경우 두 가집에선 동일하게 시객(시를 즐겨 짓는 풍류객)을 가리키지만, 또 다른 가집인 ‘가곡원류’의 육당본을 펼쳐보면 이화(李花)로 비유했다.


시조에 꽃이 등장하는 건 매우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토록 다양한 꽃이 작품의 전체를 이루며 주제를 드러내는 작품은 드물다. 이 점에 주목해 ‘모란은 화중왕이요’의 가치를 알아보고자 한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꽃의 의미
본격적으로 ‘모란은 화중왕이요’에 등장하는 꽃을 짚어보자. 모란을 선두로 매화·연화·국화·해당화는 한자어로 익숙하게 들어왔지만, 그 외 꽃들은 유추하기 어려울 수 있다. 향일화는 해바라기, 행화는 살구꽃, 석죽화는 패랭이꽃, 규화는 접시꽃, 홍도벽도 삼색도는 세 가지 빛깔이 나는 복숭아꽃을 가리킨다. 발음은 같아도 의미는 다른 꽃도 있는데 바로 앞서 얘기한 이화다. 이화(梨花)는 배꽃을, 이화(李花)는 자두를 의미한다. 이렇게 하나씩 살펴보니 우리가 가까이 두고 즐기던 꽃 대부분은 이 시조에 나온 듯하다.


꽃으로 비유된 인물들은 그 꽃의 성질이나 다른 문학작품에서 흔히 쓰인 전례를 따르고 있다. 향일화를 충신, 매화를 가난한 선비, 그리고 국화를 은둔하는 선비로 보는 예가 특히 그렇다. 배꽃을 시인으로 보는 것은 이조년의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 시조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시심 가득한 시인의 하룻밤 고뇌로 보는 게 더욱 잘 어울린다.


그런데 왜 굳이 살구꽃은 소인, 박꽃은 노인, 석죽화는 소년이라 했을까. 술집이 모인 곳을 행화촌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소인과 어울린다고 봤을까. 박꽃은 늦은 저녁에 피는 꽃이니 노인이라 할 수 있으나, 석죽화를 소년이라 한 것은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이는 아마 시절이 변하면서 꽃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습명이 지은 한시 ‘석죽화’는 석죽화를 “거친 초야의 좋은 꽃떨기”로 정의하며 “어여쁜 모습은 연못 속의 달을 꿰뚫었고 / 향기는 밭두렁 나무의 바람에 전하네”라고 묘사했다. 석죽화를 바라보며 김수장은 이제 막 씩씩하게 자라는 소년을, 정습명은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연상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석죽화, 즉 패랭이꽃이 어떤 꽃인지조차 잘 알지 못한다.

 

 

언제나 모란은 화중왕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는 꽃이 있다면 모란이다. 시인 김영랑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모란을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고 표현했고, 19세기 후반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편자 미상의 필사본 가집 ‘방초록(芳草錄)’에 기록된 시조에선 “화중지(花中之) 모란화야 네 빛 좋다 자랑 마라 / 화색(花色) 중에 빛 좋기는 설토화(雪吐花)를 당할쏘냐”라고 말하며 모란의 위상을 한풀 꺾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란이 설토화보다 못하다는 말은 아니다. 모란과 비견될 수 있는 뛰어난 부분이 있다는 건 꽃에게 영광스러운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한시 ‘석죽화’도 “세상에선 모두들 붉은 모란꽃만 사랑하여 / 정원에 가득히 심고 가꾸네”로 시작한다. 이렇듯 꽃의 왕은 모란과 어울리는 듯하다.


신라시대의 학자 설총이 지은 설화 ‘화왕계(花王戒)’에선 모란을 화왕(花王)으로 등장시켜 모든 꽃을 거느리게 한다. 온갖 꽃 가운데 홀로 빼어난 모란 앞에 장미가 다가가 “향내 풍기는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찾아왔다”고 말하며 자신을 신하로 받아주기를 요청한다. 뒤이어 할미꽃이 화왕을 찾아와 비록 아름다운 실과 삼이 있더라도 갈대나 풀도 버리지 말라며, 충언으로 소임을 다하겠다는 뜻을 비친다. 화왕은 긴 고민 끝에 간신으로 상징되는 아름다운 장미의 유혹에서 벗어나 충신인 할미꽃을 곁에 두고 나라를 공평하게 다스리는 일에 매진한다.


모란이 의인화된 작품들을 차례로 읽어보니 김수장이 시조에 꽃을 나열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모란은 꽃들 중 제일 앞서 있는 왕이고, 그를 따르는 모든 꽃은 모란이 다스려야 하는 백성이다. 모란의 세상에는 충신도 있고 군자도 있으며, 소인과 은일하는 선비가 있다. 노인이 있으면 소년이 있고, 천하고 박복한 삶을 이어가는 무당과 기생도 있다. 시를 읊거나 세상일에 코 박지 않고 제멋에 흥겨운 풍류남아가 살아간다. 그런 세상에서는 누구나 꽃이며, 어디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귀한 존재다.


중인 신분의 김수장이 비록 왕조 사회의 굴레 속에서도 깨달은 바 있다면, 사람이라면 누구든 꽃처럼 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아름다운 존재라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를 모두가 깨닫는 시대가 어서 다가오길 바란다.

 

고운기 한양대학교와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고전문학을 공부하고, 일본 게이오대 방문연구원과 메이지대 객원교수로 한일고대문학을 연구했다. 저서로는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등이 있다.


그림 이정희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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