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 맞춰 배우의 가면이 빠르게 바뀌는 변검.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가면들은 우리 삶에 잠시 머물다 가는 다양한 감정을 대변하며 심금을 울린다.
중국 역사와 문화를 취재하면서 공연장을 여러 번 기웃거린다. 밀려오는 흥분과 감동을 느끼며 때로는 눈물도 흘린다. 잔상이 오래 남아 한동안 빠져나오기 힘든 순간도 있다. 베이징에서 처음 변검을 봤을 때가 그랬다. 커다란 모자, 늘어뜨린 망토, 음악에 맞춰 순식간에 바뀌는 가면. 말로만 듣던 변검을 실제로 보니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그날 이후 변검 공연을 적극적으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눈 깜짝할 사이에 얼굴에 쓴 가면이 바뀌는지 또 어디에 숨었다가 재빠르게 등장하는 건지 궁금증은 날로 깊어졌다. 관람할 때마다 작은 손동작부터 의상의 끝자락까지 열심히 살펴보곤 했지만, 그저 놀라움의 연속일 뿐이었다.
변검은 쓰촨(四川) 지방의 무대극이다. 비옥한 땅에 온갖 산물이 나오는 곳, 천부지국(天府之國)이 바로 쓰촨이다. 주로 정통 변검과 천극을 보기 위해 촉나라 영토였던 쓰촨의 청두(成都)로 간다. 청두의 친타이루(琴台路)에 위치한 천극 전문 무대 슈펑야윈(蜀風雅韻)에서 쓰촨의 개성 강한 공연이 매일 밤 열린다. 극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건 다름 아닌 변검이다. 인기 있는 공연인 만큼 미리 예약하고 가는 것이 좋다.
슈펑야윈을 채우는 다양한 공연
슈펑야윈의 무대가 열리면 먼저 피리·호금·만돌린·태평소·징·북·생황의 합주가 시작된다. 여러 전통 악기가 하나의 오묘한 소리로 모이면서 무대는 점차 달아오른다. 쓰촨만의 독특한 피리 연주인 카시도 만날 수 있는데 고음과 저음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소리를 낸다. 입안에 작은 피리를 넣고 연주하는 묘기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사람이 내는 소리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쓰촨 서북지방에서 전래한 이 연주는 슈펑야윈에서 발굴됐다고 알려진다.
꼭두각시놀음 무대인 무어우시는 손으로 막대를 움직여 인형을 조종한다. 인형을 받치는 막대와 연기자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오롯이 인형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인형의 생동감 넘치는 동작에 푹 빠지게 된다. 공중에 수건을 날리거나 발재간을 피우기도 하고, 예쁜 꽃을 머리에 꽂은 채 나비를 잡으려 이곳저곳 뛰어다니기도 한다. 관객을 향해 입맞춤하며 작별 인사를 건네는 애교 만점 인형이다. 꼭두각시 인형이 변검을 흉내 내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그 영상을 보고 예술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엔 끝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조명이 꺼지면 그림자놀이인 셔우잉시가 등장할 차례다. 두 손만으로 동물농장을 만들어낸다. 새가 사람의 입을 쪼고 날갯짓을 하는 모습, 올빼미가 눈알을 굴리고 토끼가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이 그림자로 생생하게 재연된다. 손가락을 펼쳐 준비운동을 하는가 싶더니 돌연 준마가 내달리는 전개는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게 한다.
한 가지 덧붙이면, 쓰촨을 대표하는 공연 중 하나로 군덩이 있다. 어릿광대로 분장한 서생 남편과 부인이 등장한다. 부인은 술 마시고 도박하는 남편의 버릇을 고쳐주려 한다. 부인이 남편에게 등불 사발을 머리에 올린 채 의자를 오르내리는 엄벌을 주고, 머리 위에 있는 등불을 입으로 불어 끄라는 지시를 내리는 설정은 극을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간다. 특히 남편이 불을 끄는 데 성공하면 부인이 뒤에서 몰래 불을 붙이는 장면은 무척 해학적이다. 불을 켜고 끄기를 몇 번 반복하다 마침내 들키는 장면은 관객의 웃음보를 터뜨린다.
중국의 전통 무대극은 지방마다 이름은 물론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공연에 자연스레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대소설이나 신화, 전설을 주제로 이야기를 꾸미고 등장인물을 설정한다. 삼국지에서 마초와 장비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전마초나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등장하는 뇨용궁, 초한지에서 항우와 우희의 이별을 묘사한 패왕별희(覇王別姬) 대목이 그러하다. 중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으면 백사전만 봐도 지루할 수밖에 없다.
소설이나 신화 전체가 아니라 인기 요소가 있는 대목을 짧게는 10분, 길게는 30분 이내로 연기하는 무대극이 전국 어디에나 전승돼 무대에 오르고 있다. 변검은 천극이 발전하면서 탄생한 쓰촨 고유의 절기(絶技)다. 삼국지 촉나라 영토였던 쓰촨이 낳은 기적과도 같은 공연이다.
검보(가면), 삶의 희로애락을 끌어안다
변검이 언제 처음 시연됐는지는 불분명하다. 19세기 전후 설 명절, 사람이 많이 모이는 부두나 사당에서 처음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100년이 더 흐르고 20세기 초에 이르러 비로소 차관(茶館) 등에서 무대극 형태로 공연이 이뤄졌다. 변검은 천극의 한 대목으로 무대에 올랐으며 인물의 복잡한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추론한다. 경극이나 천극에 등장하는 배우는 캐릭터에 어울리는 분장을 한다. 그런데 만약 캐릭터의 심리 상태가 복잡하거나 심정이 자주 변한다는 설정을 갖고 있다면 어떨까? 순진한 얼굴로 접근한 도적이 불순한 의도를 드러내는 순간을 분장 하나만으로 연기하기 힘들 것이다. 한 사례로 천극 공성계에서 제갈량 역을 맡은 배우는 노심초사하고 흥분된 상태에서 사마의 대군이 물러났다는 보고를 받자 한시름 놓으며 홀가분해지는 과정을 연기해야 했다. 이에 가면을 활용해 얼굴을 홍색에서 백색으로 다시 청색으로 재빨리 바꿔 대중의 쏟아지는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천극에서 변검을 구현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크게 말검·취검·차검 세 가지 기술로 나눠 살펴보면, 말검은 분장 기름(일명 도란)이 묻은 얼굴 전체나 일부 부위를 손으로 만져 변화시키는 연기다. 인물의 표정을 바꾸는 방법으로 단순하면서도 나름대로 유용하다. 취검은 화장품 분말 상자를 바닥에 두고 얼굴을 가깝게 가져간 다음 큰 호흡으로 훅 불어 화장품 분말이 얼굴 전체에 퍼지게 하는 기술이다. 고전적인 천극 무대에서는 관객의 포용, 공감이 있어 가능했다. 그러나 변검만 전문적으로 연기하고 인기를 끌어야 하는 무대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제일 어렵지만 대부분 유용하게 사용하는 방법은 차검이다. 차검은 영화와 텔레비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여러 검보(가면)를 층층이 덧붙이고 머리카락처럼 얇은 실선과 연결한 후, 무대에서 한 장 한 장 순서대로 끌어당겨 벗긴다. 벗겨낸 검보를 아무도 모르게 망토 속으로 감추거나 부채로 가린다. 쉬워 보이지만 오랜 연습과 숙련이 필요하다. 끌어당겼으나 따라 나오지 않고 한꺼번에 검보가 우르르 쏟아지기도 한다. 숙련되지 않은 아마추어가 시연하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언론에 종종 보도된다.
변검은 캐릭터마다 뚜렷한 개성을 표현해야 하므로 많은 종류의 검보를 보유하고 있지만, 공연에는 꼭 필요한 개수만큼만 사용한다. 능력과 난이도에 따라 다르지만 적게는 5개, 많게는 15개까지 사용하고 현재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표정 변화의 무기인 검보는 홍·녹·남·황·흑·백·자·금·은 계열로 분류할 수 있다. 색깔을 활용해 충성·용맹·정의·분노·엄숙·간사·경솔 등 인간 군상을 드러낸다. 단색을 기조로 하면서 문양이나 곡선을 그려 표정의 특징을 살린다. 흑색은 포청천이나 장비의 은유다. 홍색 바탕에 눈과 입 주위 흑색, 이마엔 황색으로 치장한 검보는 관우의 상징이다. 석가여래는 금색, 조조는 백색으로 표현하며 저마다 확고한 색상과 분위기를 품고 있다.
관객에게 들키지 않고 얼굴을 변화무쌍하게 변화시키는 동작은 변검의 주요한 기술이지만, 다른 뛰어난 예술적 요소들이 함께 뒷받침하기 때문에 세계적인 공연예술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반주에 맞춰 펼치는 배우의 연기에는 품격과 자부심이 깃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손과 발의 움직임, 얼굴의 방향과 속도 그리고 온몸의 율동까지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완성도 높은 무대를 선사한다. 변검 공연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검보의 수는 연기력에 포함된다. 우리나라에도 자주 다녀간 변검왕 캉용(康勇)은 20초에 15개의 검보를 시연해 기네스북에 올랐다. 변검을 배운 영화배우 류더화(유덕화)는 10개 검보에 도달한 능력자로 알려졌다. 슈펑야윈에도 대여섯 명의 배우가 등장하지만 한두 명만이 겨우 10개를 넘긴다. 이러한 변검은 1987년부터 2급 국가기밀로 보호하고 있다.
슈펑야윈엔 강렬하고 낭만적인 공연이 이어진다. 비록 지금은 화려한 공연장에서 시연되긴 하지만, 서민의 심금을 울리던 민속적인 악기와 연기가 한곳에서 어우러지니 여행객에게는 큰 행운이다. 게다가 레퍼토리마다 깃든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찾다 보면 중국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를 하게 된다. 그중 변검은 단연 인상적이다. 변검 공연 마지막에는 가면을 쓰지 않은 진짜 얼굴이 나타난다. 이때 관객은 어느 때보다 열띤 환호성을 지른다. 그러면 배우는 다시 검보 하나를 휘릭 드러내 마지막까지 반전을 선보이며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삶 곳곳에 숨어 있는 감정들이 어떤 사건과 맞물려 모습을 드러내듯, 이야기와 발맞춰 얼굴을 바꿔 보이는 변검은 숨 돌릴 틈 없이 우리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글 최종명 중국문화 작가. 16년 동안 400여 도시를 발품 취재한 경험으로 강의와 집필, 테마여행을 기획한다. 저서로 ‘13억 인과의 대화’와 ‘민, 란’이 있다.
사진 Joanswj·Choo Yut S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