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네비게이션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빠른예매 바로가기 사이트 지도 바로가기
월간미르 상세

2019년 04월호 Vol.351

창극과 경극 사이

SPECIAL┃국립창극단 '패왕별희' 예진텐과 이시내

경극의 양식과 창극의 소리가 만나는 이번 작품에서 예진텐은

중국 특유의 화려한 색감과 한복의 고운 선을 살린 독특한 스타일을 선보일 거라 했다.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찾아낸 미적 정수를 씨실과 날실 삼아 직조해 보일 의상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 ‘패왕별희’를 기억한다면 장궈룽(장국영·張國榮)의 붉은 눈 화장과 금박과 보석으로 요란하게 치장한 경극 의상을 쉽게 떠올릴 것이다. 경극은 확실히 시각적으로 강렬한 예술 장르다. 국립창극단의 신작 ‘패왕별희’는 우리가 알던 경극의 이미지와는 또 다른 파격을 예고한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의상 디자이너 예진텐(Tim Yip)이 있다. 리안(李安) 감독의 영화 ‘와호장룡’으로 아카데미상에서 미술상을 수상한 그는 영화와 오페라·연극·무용·현대미술·패션 등 여러 장르를 오가며 독특한 스타일을 선보여온 전방위 아티스트다. 무대의상뿐 아니라 사진과 영상, 설치미술과 같은 다른 형태의 예술 작업으로 디자인의 영역을 확장해온 그의 의상들은 파리의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퐁피두 센터를 비롯해 중국과 해외 유명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온 그가 한국에서 작업하는 건 이번이 첫 번째다. 경극의 양식과 창극의 소리가 만나는 이번 ‘패왕별희’에서 예진텐은 중국 특유의 화려한 색감과 한복의 고운 선을 살린 독특한 스타일을 선보일 예정이다. 의상은 모두 한국에서 제작되며 제작 전반은 의상 슈퍼바이저 이시내가 총괄한다.


“중국 전통 복식은 한복과 비슷하면서도 달라요. 포(도포)의 기본 형태는 비슷해도 여밈 방식에 차이가 있고, 한복의 깃은 직선인 데 반해 중국은 곡선이죠. 이런 작은 차이가 결국은 큰 차이를 만들기 때문에 공부가 많이 필요해요.”

 

뮤지컬 ‘알타보이즈’ ‘쓰릴미’ 등의 의상 디자이너로 참여해온 그녀는 한국 제작소와 소통하며 예진텐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중이다. 디자인의 완성도를 위해 두 사람은 얼마 전 함께 동대문 원단 시장을 찾기도 했다.


“‘패왕별희’는 중국의 이야기지만 한국 고유의 미적 온도를 반영하고자 해요. 어떻게 그 아름다움을 전환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 속에서 찾아낸 미적 정수를 씨실과 날실 삼아 아름다운 옷을 직조해내는 일은 예진텐의 전문 분야다. 1993년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 ‘라스트 템테이션’에서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과 조각 작품을 중국 전통 의상과 결합하며 비주얼 아티스트로서 존재감을 드러낸 그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각색한 작품에 경극의 요소를 차용하기도 했다. 19세기 청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한 ‘와호장룡’에서도 리안 감독과 함께 경극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 장엄한 풍경 속에서 느린 춤을 추는 듯한 배우의 움직임과 함께 예진텐은 매우 시적인 이미지를 선보였다. 그는 청조의 낭만적인 실루엣에 당나라 시대의 우아하고 조화로운 색감을 믹스했다. 예진텐의 이 같은 접근은 동양의 신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를 탐구하는 예술적 호기심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전통과 현대를 연결해 새로운 시각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홍콩에서 처음 이 일에 뛰어들 당시만 해도 서양 문화에 대한 환상이 있었어요. 모든 게 다 좋아 보이고 우리가 가진 것보다 나아 보였죠. 그런 사회 분위기에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중국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그중에서도 ‘베이징 오페라’로 불리는 경극은 완벽한 형태의 예술적 시스템을 갖춘 공연이었습니다. 감정의 표현 방식을 비롯해 모든 면에서 흥미로운 예술 장르죠.”


무대 세트가 간소한 경극에서 의상은 매우 중요한 시각 요소다. 의상의 등판 부분을 장식한 깃발이 천만 군사를 상징하기도 하고, 배우들은 소매 끝에 달린 긴 천으로 슬픔을 표현한다. 소맷자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인물의 감정을 연출하는 것 역시 춤과 노래만큼이나 고난도의 기술을 요한다. 경극에서 의상은 단순히 옷이 아니라 빈 무대를 가득 채우는 역사적 사건이고 액팅인 셈이다. 예를 들면 경극에서는 ‘4’라는 숫자는 ‘많다’를 의미한다. 만약 무대 위에 네 명의 군인이 나와 싸운다면 엄청나게 큰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등에 네 개의 깃발을 꽂은 장군이 등장할 때는 거대한 군대가 그의 등 뒤에 있다고 상상하면 된다. 무수한 상징과 기호로 가득한 경극은 알면 알수록 더욱 크고 깊어지는 무한한 세계다.


“중국에서는 경극의 의상 파트를 ‘매직 박스’라고 불러요. 늘 박스 안에 온갖 것을 담아 공연을 다니기 때문인데, 이 박스에 담긴 의상에는 극의 상징적인 요소들이 전부 들어가 있어요. 이 박스만 있으면 어디서든 공연할 수 있는 일종의 마술 상자라고 할 수 있죠(웃음).”


경극이 한창 인기를 끌던 시대에 열성 팬들은 이 마술 상자 안의 비밀을 줄줄이 꿰고 있었고 경극 배우가 아이돌 스타나 다름없었다. 물론 경극을 전혀 모른다고 해도 창극 ‘패왕별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대만 당대전기극장의 대표로서 사라져가는 중국 전통극 양식을 현대화하는 작업을 지속해온 우싱궈 연출과 예진텐이 경극의 상징적 요소들을 단순화했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전 지식 없이도 우리가 창극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경극에서) 기존의 상징적 규칙들은 심플해지거나 오히려 추상적으로 변화됐어요. 그런 식으로 밸런스를 맞춰가고 있죠. 이 작품을 그저 하나의 예술 형식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세대에겐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나 패션처럼 느껴질 수 있을 거예요.”


예진텐이 이제 막 수정 작업을 끝낸 의상 스케치에서 항우의 어깨와 등에는 무려 여섯 개나 되는 깃발이 장식돼 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거죠(웃음).”
숫자의 비밀을 몰라도 항우의 붉은 빛을 띠는 갑옷을 본다면 누구나 그 자체로 남다른 위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패왕별희’ 의상이 건넬 이야기
‘패왕별희’의 시대 배경은 강호의 영웅들이 자웅을 겨루던 춘추전국시대다. 극 속에서 항우가 입을 의상의 기본 색감인 붉은색과 검은색이 주로 쓰이던 때다. 귀족 가문인 항우의 의상은 화려한 금박 장식이 돋보이며 비교적 단단한 느낌을 주는 소재를 택했다. 항우의 젊음과 힘, 고귀하고 강직한 성품을 반영한 디자인이다. 핏빛으로 물든 항우와 그의 연인 우희의 의상은 두 사람의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 하층민 출신인 유방의 의상은 한결 유연하고 컬러는 회색에 가깝다.

 


“중국에는 ‘너무 완벽하면 망가지기 쉽다’는 얘기가 있죠. 좀 부족해 보이는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고 어느 정도 허술한 구석도 있어야 성공한다는 건데, 창극 ‘패왕별희’ 이야기도 마찬가지죠. 실제 우리 삶이 그렇기도 하고요.”


예진텐이 세밀하게 짠 그림을 실제로 완성하는 건 의상 슈퍼바이저 이시내의 몫이다. 원단 조각이 빼곡하게 붙은 묵직한 작업 노트를 들고 온 이시내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나가고 있다며 “아무래도 국내 원단이 중국만큼 다양하진 않아서 한계가 있어요.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배우의 움직임도 소재 선택에서 고려할 부분이다. 아크람 칸을 비롯한 여러 장르의 무용단과도 오랫동안 협업해온 예진텐은 춤의 무게 중심을 파악하는 것을 ‘디자인의 출발점’이라 생각할 만큼 움직임에 따라 의상에 사용할 천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는 동양의 춤은 움직임을 숨기거나 추상화하는 경향이 있어, 이런 부분이 의상에 반영됐을 때 천이 일종의 진술자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서양의 현대무용이 상반신을 많이 사용한다면 극단적으로 느린 일본의 전통 가면극 노의 경우엔 무게 중심이 아래에 있다. 이시내는 예진텐이 그린 디자인의 특성을 고스란히 살리며 그 의도가 더욱 명확해질 수 있도록 수시로 공연 연습 상황을 살피고 있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봤는데 창 같은 무기를 다루는 장면이나 움직임이 생각보다 많았어요. 그래서 의상 소재를 처음에 생각한 것보단 조금 더 가벼운 재질로 바꾸는 문제를 의논하느라 지난 이틀간 예진텐을 제가 많이 괴롭혔죠(웃음).”


의상 다자이너와 슈퍼바이저로서 두 사람이 생각하는 창극 ‘패왕별희’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장면이다.

“우희가 패왕 앞에서 슬프고도 아름다운 검무를 추다 자결해요. 그리고 그 장면에서 항우는 지금까지 입고 있던 모든 옷을 다 벗게 됩니다.”


결국 그 마지막 순간을 위해 두 사람이 지금껏 달려온 것이기도 하다. 공연에서 의상은 그 자체로 관객에게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카메라의 앵글에 따라 배경이나 인물의 일부로 기록되는 영화와 달리 공연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 위에 전체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공연을 위한 의상 디자인이 매혹적인 이유다. 예진텐은 인터뷰 말미에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전 인간의 비밀을 탐구한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합니다. 의자 같은 사물을 볼 땐 좋고 싫음이 명확하지만 사람을 대할 땐 쉽게 판단하기 어렵죠.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투영해 상대를 바라봅니다. 소설이나 드라마 속 캐릭터에 자기감정을 이입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인물을 상상해내죠. 무대에서는 그가 입은 옷이 그 인물을 해석하는 열쇠가 되고, 인물 간의 관계를 컨트롤하는 역할을 하기도 해요. 무대 위에 배우가 올랐을 때 비로소 많은 이야기가 깨어나고 무대와 객석 사이에선 에너지가 교류됩니다. 무대에는 그런 특별함이 있죠.”

 

이미혜 칼럼니스트 겸 문화 기획자. 전 ‘보그’ 피처 디렉터로 디자인과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쓰며 패션 전시와 대중문화 아카이빙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사진 김창제

사이트 지도

사이트 지도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