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현대의 만남을 추구해온 예인들이 창극과 경극의 만남을 통해, 고전 속 영웅을 현대로 소환한다.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고 상상할 수 있을까.
국립창극단이 선보이는 신작 ‘패왕별희’는 초패왕 항우의 삶과 죽음, 사랑과 회한을 조명하면서 강렬한 남성상을 무대 위에 소환한다. 그동안 국립창극단은 ‘메디아’ ‘트로이의 여인들’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소녀가’를 통해 비극과 희극, 고전 속 인물부터 현대적인 인물에 이르기까지 주로 여성이 두각을 나타내는 공연을 선보여왔다. 그만큼 이번 공연에서 강렬한 남성 주인공을 통해 소리가 전하는 힘 있는 울림을 들려준다는 것이 이전과 다르다.
창극 ‘패왕별희’는 패왕 항우와 우희의 슬프고 결연한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두면서 동명 경극의 서사를 따라간다. 그러나 극본가이자 안무가인 린슈웨이는 더 나아가, ‘홍문연(鴻門宴)’ 장면과 초나라의 장군이던 한신이 항우를 배신하고 유방에게 가는 이야기를 추가하면서, 중국 역사에 익숙하지 않을 한국 관객도 항우와 우희의 이야기에 담긴 비극성을 이해하기 쉽도록 대본을 다시 집필했다.
총 일곱 개의 장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오강(烏江)에서 시작해 같은 장소에서 항우가 자결하면서 변주하듯이 마무리된다. 2장인 ‘홍문연’은 항우와 유방이 홍문에서 회합하는 장면을 다룬다. 회왕은 한때 진나라에 항거하기 위해 투합했던 두 사람에게 함양(진나라의 수도)을 먼저 치는 자를 왕으로 삼겠다고 약조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유방이 먼저 함양을 차지하자, 항우를 왕으로 추대하려던 범증이 홍문연에서 유방을 죽이려는 계책을 세운다. 위기에 빠진 유방은 간신히 탈출해 목숨을 구한다. 그리고 초나라와 한나라 사이에는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여치의 도움으로 유방의 세력은 확대되고 4장에서 ‘십면매복(十面埋伏)’의 전술에 의해 항우는 유방에게 완전히 포위된다. 서로 대치 중인 상황에서 한나라 군사들은 구슬프게 초나라 노래를 부르고, 사방에 울려 퍼지는 고향의 노랫소리에 초나라 군사들은 마음이 흔들린다. 이러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 속에서, 우희는 대세가 기울어 더는 묘책이 없음을 깨닫고, 연인인 항우를 위해 검무를 추며 포위를 뚫고 강동으로 돌아가 재기하라는 마음을 전한다. 춤이 끝날 때, 자결을 통해 자신의 마음과 사랑을 표현한다. 결국 항우는 자신이 아끼는 오추마를 타고 적군을 무찌른 후 오강에 다다르지만 강을 건너는 대신에 자결을 택한다. 항우의 선택은 질문을 남긴다. 어째서 항우는 강동으로 건너가지 않았을까. 중국 송대(宋代)의 유명한 여성 시인인 이청조(李淸照)는 항우의 선택을 두고 이렇게 적는다. “지금까지 항우를 잊지 못함은, 그가 강동으로 건너가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네.”
경극과 창극의 만남
시대를 초월해 끝없는 울림을 주는 항우의 이야기는 대만 출신의 배우이자 연출가인 우싱궈(吳興國)를 만나 경극이 아닌 창극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 작품의 연출을 맡은 우싱궈는 1986년 대만 당대전기극장(當代傳奇劇場)을 설립하고 예술감독을 맡아 서양의 고전들을 경극과 접목해 전통극의 현대화 작업에 주력해온 인물이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욕망의 제국’이라는 이름의 경극으로 옮기는가 하면, 직접 1인 10역을 소화하며 열연한 ‘리어왕’과 ‘템페스트’를 비롯해 현대의 부조리극인 ‘고도를 기다리며’를 경극으로 풀어냈다. 이처럼 경극에 정통한 우싱궈 연출이 창극이라는 장르와 만나면 어떠한 결과물이 탄생하게 될지 궁금하면서도 기대된다. 경극이 노래(唱)·대사(念)·동작(作)·무술(打)의 네 가지 요소가 종합된 공연 예술 형태이자 많은 상징과 양식화로 시각적인 요소를 활용하는 반면, 창극은 소리에 집중하면서 오히려 추상적인 세계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극과 창극이라는 두 예술 형태가 이미 너무도 확연한 차이를 전제하고 있어서, 이 두 요소가 만났을 경우 그것이 창조적인 결합이 될지 이질적인 충돌로 남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메디아’나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이질적으로 보이는 그리스 비극과 창극의 만남이 오히려 내면과 외연의 확장으로 이어졌듯이, 경극의 화려하고 외적인 세계와 창극의 내밀한 정서의 만남이 긍정적으로 발현될 것이라 전망해본다.
무엇보다 우싱궈와 오랫동안 협업해온 예진텐(Tim Yip)이 의상 디자이너로 참여하면서 무대 미학에 대한 기대를 더욱 증폭시킨다. 사실 예진텐을 의상 디자이너로 한정해서 바라보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영화 ‘와호장룡’으로 제73회 아카데미상에서 미술상을, 영국 영화 텔레비전 예술 아카데미(BAFTA) 일명, 영국 아카데미상에서 의상상을 거머쥐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아트 디렉터로서의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예진텐은 로버트 윌슨, 아크람 칸, 클라우드 게이트 무용단 등과의 작업을 비롯해 전시 기획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서 활동하는 전방위 아티스트로 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예진텐은 우싱궈 연출과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만큼 경극에도 정통하지만, 한국에서의 작업을 통해 받은 영감을 의상에 녹여내면서 새롭고 독특한 창극의 무대 미학을 일궈낼 것이다. 무엇보다 의상의 실질적인 구현 작업은 한국의 의상 슈퍼바이저인 이시내 디자이너와의 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국적인 소재와 원단에 대한 이해가 더해져 어떠한 무대의상이 탄생할지 궁금증을 남긴다.
또 한 가지, 창극에서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다. 이러한 점에서 음악감독과 작창을 맡은 이자람은 창극을 처음 연출하는 우싱궈에게 작품의 적절한 밸런스를 끌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협력자가 될 것이다. 이자람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요소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실험적인 공연을 만들어왔기 때문에 두 사람의 세계가 만났을 때 어떠한 소리로 무대가 채워질지 상상하는 것조차 새롭다.
전통과 현대, 패왕과 영웅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항우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남길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우싱궈 연출은 11세 때부터 경극을 수련했으며 전통 예술에 능통한 인물이다. 그러나 경극을 하나의 전통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끊임없이 현대화하기 위해 주력해온 예술가이기도 하다. 이와 유사하게, 국립창극단원들은 어려서부터 판소리를 익힌 예인들이지만, 창극을 통해 이를 동시대 예술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에 있다. 이처럼 전통과 현대가 우싱궈 연출의 경극과 창극을 매개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만큼, 이 두 세계의 만남에서는 분명 깊은 소통이 생겨날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항우는 비록 전쟁에서 패했지만, 오늘날까지 영웅으로 남아 있다. 사마천도 ‘사기’를 집필할 때, 그를 제왕 편에 수록하면서 영웅으로 기술한 바 있다. 영웅과 필부를 가르는 것은 어쩌면 가장 극단의 상황에서 내리는 선택을 통해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닐는지. 권력에 대한 욕망은 끊임없이 전쟁을 불러일으켰고, 그 폭력의 연쇄 속에서 수많은 비극과 영웅들이 태어나 각각의 이야기를 남겼다. 항우의 칼끝에서 전해지는 전쟁과 욕망의 허망함은 하나의 푸가(fugue)처럼 변주되면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울림을 준다.
창극 ‘패왕별희’에 새롭게 추가된 주요 인물로 맹인 노파가 있다. 그녀는 극의 외부에서 극 안의 상황을 바라보고 논평한다. ‘트로이의 여인들’의 고혼처럼, 작품 곳곳에 등장해 권력과 욕망을 둘러싼 인간사를 애잔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항우의 영웅성을 기리고 있기도 하다. 결국 ‘패왕별희’는 먼 중국의 고전 속 영웅을 불러내 과연 이 시대에 어떠한 영웅이 필요한지 질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글 이단비 영어와 독일어로 된 희곡을 번역하고 소개하며, 연극과 뮤지컬, 오페라 등을 오가며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