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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2월호 Vol.349

다양한 문화를 모아 정열의 움직임을 빚다

전통 예술 기행┃스페인의 민족예술 '플라멩코'

열정적인 춤사위로 마음속 깊이 가라앉은 슬픔과 두려움을 털어내는 플라멩코.
형식에 구애하지 않고 자유로이 즐기는 플라멩코의 역사엔 집시의 애환이 담겨 있다.
고유의 민족성을 바탕으로 여러 나라의 문화를  융합해 만들어낸 강렬한 춤은 모두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문득 사는 게 달팽이 껍데기 안에 갇힌 듯 답답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홀로 스페인 여행을 떠났다. 그라나다 집시 동굴에서 스페인의 민족예술 플라멩코와 처음 만났는데, 평소 갖고 있던 인상과 사뭇 달랐다. 열정과 장미, 화려한 드레스로 기억된 모습과 다르게 동굴의 무희들은 허무와 체념으로 응어리진 표정을 짓곤 허름한 의상을 걸치고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 실망한 낯빛을 읽은 나이 든 집시 무용수가 매섭게 나를 노려봤고 눈이 마주친 순간 세상의 모든 비탄을 뿜어내는 그의 눈빛에 속수무책으로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가 춤추는 광경을 보며 바닷속 심연으로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두엔데(Duende)를 경험했다. 두엔데는 강렬한 춤을 통해 영혼이 폭발하는 듯한 절정의 감정이며 플라멩코의 혼이라 일컬어진다. 그날 나는 세찬 힘으로 내 영혼을 사로잡은 플라멩코를 반드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플라멩코를 배우기 위해 도전한 스페인 유학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플라멩코를 배우면서 슬픔?고통?불안 등 부정적인 감정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냈기 때문인지 어느 때보다 삶의 생동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플라멩코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원초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특히 인간 내면의 고통과 어둠을 분출해 무용수뿐만 아니라 지켜보는 관객의 마음도 정화한다. 이런 치유력 덕분인지 19세기 후반 낙천적이고 열정적인 기질을 가진 남부 스페인 사람들에게 각광받았고, 어느새 스페인 대표 문화로 자리 잡았다.

 

춤과 노래로 삶을 이어가다
플라멩코는 15세기 인도에서 쫓겨나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에 정착한 소수민족 집시들이 만든 예술이다. 집시들은 인도 음악, 안달루시아의 향토 음악, 가톨릭 비잔틴 음악, 유대인의 예배 음악, 집시 고유의 음악 등을 융합해 플라멩코를 완성했다. 마치 여러 종류의 포도가 섞여 안달루시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격하게 발효된 와인처럼 오묘하고 통렬한 예술이 탄생한 것이다. 그 영향으로 플라멩코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신비한 매력과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마력을 품고 있다.


스페인에서 히타노(Gitano)로, 독일에서 치고이너(Zigeuner)로, 프랑스에서 보헤미안(Bohemian)으로 불리는 집시는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나라와 종교가 없던 유랑민들은 어느 시대건 핍박의 대상이었다. 한 지역에 정착하지 않고 여러 나라를 떠돌던 집시들은 생계를 위해 노래와 춤을 이어갔고 설움과 한을 음악에 녹였다. 그들이 거쳐 온 나라의 문화와 음악을 융합해 독창적인 스타일로 재탄생시킨 예술이 바로 플라멩코다. 인도에서 동유럽과 이베리아반도로 이동하다 17~18세기경 타지역인에게 포용적인 따뜻한 기후의 스페인 안달루시아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그들만의 문화와 예술적 재능을 탄탄하게 다졌다. 플라멩코의 어원은 아랍어 Felag(농부)와 Mengu(도망자)의 합성어라는 설이 있다. 물론 그 외에 영어 Flame(불꽃)과 Flamingo(홍학) 등이 어원이라는 다양한 설도 존재한다. 초반의 플라멩코는 반주 없이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리듬을 만들어 노래하고 춤을 췄으나 예술 장르로 단단히 입지를 다지며 기타와 타악기 등이 결합됐다. 한층 화려하고 즉흥적인 민족예술로 발전한 것이다.

 

 

불꽃처럼 타오르고, 마법처럼 치유하다

반짝이는 별이 빛날 때 나 돌아온다
달콤한 기억은 심장에서 나와
방황하는 나를 따른다
창백한 고통의 시간인 아픔도
별이 빛나는 밤 춤추면 꿈일 뿐이네
꿈꾸듯이 나 언제나 돌아와
광장의 집시들과 춤추리
유랑하는 그림자
환상의 돛단배의 닻을 올려 강을 따라 귀향하리


이 글은 내가 직접 지은 칸테(Cante) ‘귀향’의 가사다. 칸테란 스페인어로 ‘노래’를 의미하며 플라멩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거친 목소리로 부르는 집시들의 노래는 청자의 심금을 울리는데 그중 칸테 혼도(Cante jondo)는 ‘심오하고 깊은 노래’라는 뜻으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고통과 탄식을 절규하듯 불러 플라멩코의 정수로 통한다. 플라멩코는 어원에 관한 설 중 하나인 ‘불꽃’처럼, 온몸으로 타오르다 사그라지는 아름다움과 어둠을 동시에 표현하는 춤이다. 거친 에너지와 광기가 느껴지는 영혼의 춤으로 인생의 깊이를 아는 무용수가 허무와 분노의 감정을 더욱 잘 녹여낼수록 플라멩코의 진수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고 말한다. 스페인어로 발동작을 뜻하는 사파테아도(Zapateado)는 플라멩코만의 독특한 기교다. 발바닥 전체로 치는 골페(Golpe), 뒷굽을 치는 타콘(Tacon), 앞코를 치는 푼타(Punta) 등 플라멩코 구두의 각 부분으로 소리를 다르게 내서 리듬을 풍부하게 표현한다.


12박자를 기본으로 하는 플라멩코는 박자 안에서 치고 빠지는 엇박이 많아 이에 대한 충분한 학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무용수가 춤을 출 때 팔마스(Palmas), 즉 손뼉치기로 박자를 맞추는 게 아주 중요하다. 춤추는 동안 박자를 놓치지 않도록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못하는 데서 얻는 전율과 매력적인 엇박자의 조합은 ‘무질서 안의 질서’ ‘자유 안의 절제’라는 묘미를 준다. 창작자가 비주류인 집시인 점부터 형식과 규정이 없는 춤의 구성까지, 하나씩 짚어보면 플라멩코는 모든 것이 엇박자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그 매력은 전 세계를 매료시키기 충분하다. 모두가 일사불란한 정박자의 삶을 살 필요가 있을까? 나는 플라멩코에 담긴 엇박자의 파격과 반항 그리고 긴장된 세계를 사랑한다.


플라멩코에서 기타 연주를 토케(Toque)라고 하는데, 토케는 반주 역할에서 그치지 않고 서막이나 춤이 쉬는 부분에서 독립적으로 고난도의 연주를 선보이기도 한다. 꾸밈음인 멜리스마(Melisma)와 장식음인 팔세타(Falseta)가 특징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해 예술적 완성도가 높아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플라멩코를 빛내주는 추임새 할레오(Jaleo)는 공연자를 응원하고 관객의 흥을 돋운다. “올레~ 비엔!” 이렇게 추임새를 넣으면 절로 힘이 난다고.

 

스페인 전역에서 정열적인 춤사위를
플라멩코를 배우기 위해 처음 방문한 곳은 마드리드에 있는 플라멩코 종합학교 아모르 데 디오스였다. 그곳에서 플라멩코의 전설 타티 선생님을 만났다. 카리스마 넘치는 그녀의 인상과 용광로처럼 뜨거운 수업 열기에 반해 곧장 등록했고, 제일 앞줄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수업을 기다렸다.


반갑게 아침 인사를 하며 들어온 타티 선생님을 따라 맞춰본 스텝은 어려웠지만 너무도 재미있고 신기했다. 거울을 보니 웃음이 만연한 내 얼굴이 보였다. 미처 알지 못하고 10년 이상의 경력자만 받는 고급 강좌에 들어가, 고참만 선다는 앞자리를 차지한 나를 귀엽게 봐주신 선생님 덕분에 천천히 즐겁게 플라멩코와 친해질 수 있었다.


스페인에 거주하며 다양한 곳에서 플라멩코를 접하곤 했는데, 각 지방의 축제에서도 정열적인 플라멩코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플라멩코는 18세기에 현재의 형태에 가까워졌고 축제를 통해 유명해졌다. 스페인 각지에 크고 작은 플라멩코 축제가 있지만, 2월에는 헤레스 지방에서 열리는 플라멩코 축제가 유명하다. 공연과 강습이 같이 진행되는데 미리 예매하고 가는 게 좋다. 20세기 들어 플라멩코는 무대 공연으로 나아가며 ‘타블라오(Tablao)’라는 작은 공연장에서 주로 공연됐다.


자유로운 움직임의 춤 플라멩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은 곧 움직임’이라 말했고, 플라멩코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움직임’이다. 문화와 문화가 섞이고 불꽃과 얼음이 공존하는 플라멩코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

 

오미경 작가이자 플라멩코 무용가. 관동대학교 방송연예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스페인 문화와 플라멩코, 인문학을 크로스오버한 강연으로 플라멩코(불꽃)로 타오르며 세상을 따뜻이 데우고 환하게 밝히고 싶은 진정한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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