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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2월호 Vol.349

호두까기 인형에서 사계까지

세계무대┃독일 무용계의 저력

주마다 1개 이상의 국립·주립 발레단이 운영되고, 젊은 안무가의 새로운 시도가 끊이지 않는 나라.
독일이 무용 강국으로 우뚝 설 수밖에없는 이유다.

 

 

독일에서는 연말이 되면 많은 사람이 가족 단위로 연례행사처럼 공연장을 찾는다. 이때 가장 인기 있는 레퍼토리는 발레 ‘호두까기 인형’이다. 베를린 국립 발레단(Staatsballett Berlin) 역시 2018-2019년 시즌에 예외 없이 ‘호두까기 인형’을 선보였고, 발레단 직속 발레학교 학생들의 깜찍하면서도 수준 높은 퍼포먼스로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러시아 출신 안무가 바실리 메드베데프와 유리 부를라카의 고전적이고 역동적인 안무는 19세기 말, 마린스키 극장에서 선보인 초연작의 분위기를 완벽히 재현함과 동시에 과감하고 참신한 재해석으로 주목받았다. 찬사와 주목을 한 몸에 받은 이 공연은 2018년 11월 17일부터 12월 27일까지 10회 공연됐고 모두 전석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독일에서 무용 공연은 일부 전문가 및 애호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매해 연말이면 온 가족이 ‘호두까기 인형’을 보러 공연장을 찾는 것처럼 무용 공연이 생활 속 깊이 정착돼 있다. 이것이 가능한 데에는 독일의 특별한 문화 행정 및 문화 인프라 운영이 큰 역할을 한다. 독일에는 17개의 국립·주립 발레단이 있는데, 이들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국립·주립극장에 전속돼 자체적인 레퍼토리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전속 안무가 및 감독이 운영을 총괄한다. 독일이 16개 주로 이루어져 있으니, 주마다1개 이상의 국립 혹은 주립 무용단을 운영하는 셈이다. 한 시립 발레단만 해도 32개가 넘는다. 물론 이들은 전통적인 클래식 발레뿐 아니라 새로운 창작 작품도 끊임없이 제작하고 있다. 이외에도 창작 무용만 담당하는 탄츠테아터와 댄스 컴퍼니만도 16개에 달한다. 이들은 공공 기금으로 운영되거나 사립 혹은 법인으로 운영되기도 한다. 이 수치는 독일연방 발레 및 탄츠테아터 디렉터 연합회가 발표한 공식 정보에 근거한 것이며, 여기에 등록되지 않은 수많은 소규모 무용단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국립·주립·시립 무용단은 전용 극장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해당 도시의 오페라 극장이나 연극 공연장을 같이 사용하면서 독자적인 체제로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독일에서는 대도시가 아닌 일반 중소도시에도 대개 자체적으로 프로덕션을 꾸릴 수 있는 무용단이 존재하며, 일반 시민이 원하면 언제라도 무용 공연을 볼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다.


인구 30만의 중소 도시인 만하임도 예외는 아니어서, 1957년에 설립된 만하임 국립극장은 전속 극단·오페라단·무용단을 운영 중이며, 1979년에는 만하임이 속한 연방주인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최초로 독자적인 공연장을 갖춘 어린이·청소년 전문 극단인 젊은 국립극장을 독립적으로 설립·운영하고 있다. 젊은 국립극장은 연극·무용·오페라·인형극 등을 공연하는데, 아이들이 직접 기획이나 제작 과정에도 참여해 관객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만하임에서 만난 요한 인에르
만하임 국립극장의 레퍼토리 중 2018-2019년 시즌에 크게 주목받은 작품으로는 전속 안무가 주세페 스포타가 비발디의 사계를 차용해 창작한 ‘사계’와 스웨덴 출신 발레 리노이자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의 안무가이던 요한 인에르의 ‘엠티 하우스Empty House’ 등이 있다. 이번 시즌에는 이 두 작품이 한 무대에 올랐다. 2019년 1월 11일 초연한 ‘사계’는 비발디라는 거장의 작품을 어떻게 현대무용으로 풀어냈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에 개막 전부터 언론과 관객 모두의 큰 관심을 끌었다.


공연은 막이 오르기 전부터 소리 없이 시작된다. 무용수는 마치 봄이 오기 전 싹을 틔우기 위해 땅속에서 씨앗이 몸부림치듯, 막 뒤에서 자연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공연을 준비하고, 막이 오르면 서서히 식물들이 비닐 기둥에 갇혀 괴로워하는 몸짓이 이어진다. 여름과 가을에는 플라스틱 통으로 가려진 하늘 아래서 점점 생존 공간이 좁아지는 모습과 다양한 재난이 닥치는 장면, 이윽고 겨울에는 두 마리의 북극곰이 사이좋게 살던 얼음판이 줄어들며 괴로워하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비발디의 사계가 계절의 변화와 함께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것으로 무심코 생각해오던 우리에게 ‘자연에게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일까’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에 의한 자연 파괴 현상을 이처럼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표현하면서, 우리의 자각을 촉구하는 이 작품으로 인해 이제 비발디의 사계가 더는 아름답게만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자연의 아우성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이 공연은 자연과 조화로운 공존을 모색해 더 이상의 파괴를 막아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또 하나의 작품인 요한 인에르의 ‘엠티 하우스’는 2002년 5월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에서 초연했다. 2005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쿨베리발레를 위해 재편성된 버전으로 2008년 독일에서도 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에 의해 소개된 바 있다. 스페인 국립 무용단의 ‘카르멘’으로 국내 관객에게도 친숙한 요한 인에르는 네델란드 댄스 시어터 시절 창작한 여러 작품으로 이미 세계적인 대가의 반열에 오른 안무가인데 독일 중소 도시의 무용단과 협업한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공연은 어둡고 텅 빈 무대 한쪽 공간, 흰 천이 마치 벽처럼 드리워져 있고, 그곳에서 한 무용수가 고독하게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원색의 상의와 까만 하의를 입은 무용수가 강렬한 몸짓으로 괴로워하며 무대를 헤매다 벽에 부딪히면, 또 다른 무용수가 등장해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무용수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벽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낸다. 이들은 무대를 활보하며 서로 가까워지려 하지만 결국 가까워지지 못하고 튕겨 나간다. 마지막에는 모두 혼자가 되고 만다. 빈집에 들어서서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누군가 들어와 말 걸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이 작품은 빈집의 은유를 통해 현대인의 방향성 상실, 그리고 타인과의 소통을 바라지만 소통이 불가능하거나 제대로된 소통이 부재하는 현실을 간결한 무대와 감각적인 퍼포먼스로 전달하고 있다. 세르비아 출신의 작곡가 펠릭스 라이코의 단순하지만 강렬하고 아름다운 현악 사중주 ‘콘체르트Concert ′98’의 선율은 처절한 외로움을 표현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했다. 공연이 끝난 후 이어진 커튼콜은 10분이 넘도록 그칠 줄 몰랐고, 결국 두 안무가와 발레단장이 다섯 차례 이상 인사한 후에야 박수가 잦아들었다.


‘사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고찰 및 환경문제에 대한 직접적 발언이었다면, ‘엠티 하우스’는 인간의 본질적인 고독과 소통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이라고 하겠다. 공연을 보는 내내, 지방 중소 도시의 공연장에서도 이렇게 세계적인 수준의 공연을 쉽게 접할 수 있고, 젊은 안무가들의 새로운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독일 무용계가 부럽게 느껴졌다. 이런 저력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문화 인프라와 독일 정부의 무용 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독일의 여러 주에서는 개인의 창조성과 표현력 및 타인과 조화로운 협력을 전제로 하는 무용 예술의 성격에 주목해 교육 현장에서 창작 활동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만하임이 위치한 바덴 뷔르템베르크주에서 학교와 무용 전문가들을 연계해 다양한 소극장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무용이 움직인다(Tanz Bewegt)’도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또한 기존의 제도적인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창작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 정부는 ‘무용협약(Tanzpakt)’이라는 시·도·연방정부의 프로젝트를 2015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에게 무용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 창작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이 끊이지 않는 한 독일 무용의 미래는 당분간 쭉 밝을 것이다.

 

박은영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튀빙겐에 거주하며 한·독 문화예술교류 기획 및 컨설팅 업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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