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고등학교 근처에 사는 까닭에 가끔 멀리서 들려오는 대금 소리를 즐기게 된다.
그럴 때마다 수양버들 아래서 산들바람을 맞으며 젓대를 부는 옛 선비의 모습이 떠오른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대금 주자 7명 중 6명이 남성이라니, 영 틀린 이미지는 아니다.
하지만 박경민 대금 수석을 만나고 나니 이제 좀 다른 그림이 그려질 것 같다.
“요샌 여자도 많이 불어요. 체격 큰 남자들이 아무래도 유리하겠지만 여자들도 곧잘 불죠. 호흡의 문제거든요. 저는 어려서부터 관악기 소리를 잘 냈는데, 한의원에서 음양오행 체질 검사를 해보고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폐가 1등인 체질이더군요.(웃음)”
가녀린 체구의 여성이라는 첫인상도 잠시,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이 인상적이다. 눈빛만 강한 건 아니다. 박경민 수석은 별명이 ‘태풍’일 정도로 남자 못지않은 폐활량을 자랑한다. 그런데도 요즘 소리에 대한 고민이 많다고 했다. 무슨 얘길까.
“벌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예리하게 모아지는 소리를 내고 싶어요. 대금은 플루트에 비해 취구가 두 배 정도 넓어요. 소리를 모아서 내도 바람구멍 자체가 훨씬 넓고 몸통도 커서 자연적인 바람 소리가 적당히 섞이며 소리가 나죠. 전통의 호흡에서 좀 벗어난 창작음악을 하다 보니 모아져서 깔끔하게 나는 소리를 선호하게 됐어요. 제가 가진 음색을 확장하기 위한 고민을 많이 하는 중이에요.”
사람의 숨결이 자연에 닿아 소리가 되는 아날로그적인 악기이기 때문일까. 박경민은 대금에는 다른 악기가 갖지 못한 힘이 있다고 했다. “대금은 음색이 무척 다이내믹해요.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음색도 있고, 높은 음역을 연주할 때면 청을 울리면서 마치 장군이 칼을 휘두르는 것처럼 날카롭고 단단한 음색을 내기도 하죠. 한 지인은 제가 녹음해 건네준 곡을 듣다가 마음속 깊은 곳을 후벼 파는 느낌이 들어 설거지하다 말고 눈물을 쏟았다더군요.(웃음)”
‘예술가의 혼이 악기 끝에 핏방울로 서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연주자에게는 어렵고 까다로운 악기가 대금이다.
“애증의 관계죠.(웃음) 대금은 조금만 손을 놓아도 내 김을 안 받아들이려는 게 있어요. 김을 불어넣는 악기다 보니, 김 하나로도 달라지거든요. 똑같이 불어도 김이 쏙쏙 안기는 맛이 없고, ‘나 좀 멀리했지? 고생 좀 할 거야’라고 약을 올리죠. 청 울림도 대금의 고유한 음색 중 하나인데 그것도 계속 만져주고 예뻐해야 제 소리를 찾을 수 있거든요. 녹음할 때도 매번 컨디션이 달라지니 까다롭죠. 정체되기 쉬운 연주자에게 수준 높은 소리를 끊임없이 추구하게 만들고, 좋은 소리를 스스로 들었을 때 만족할 수 있으니요.”
대학원에서 음악치료를 전공한 그녀는 올 상반기 첫 개인 음반 발매를 앞두고 있다. 남들과 다른 ‘내 음악’을 하고 싶어서 선택한 음악치료 분야에서 솔리스트로 활약하기 위한 전초전 같은 작업이 이번 음반이다. 구전으로 내려오던 오래된 찬송가를 현대적으로 편곡해 대금과 핸드벨 연주가 어우러진 독특한 음악을 만들고 있다고.
“악단 안에서 어떻게 소리를 내야 하는지 확신이 서고 나니 그걸 넘어선 내 것도 하고 싶어져서 저만의 음악적 스타일이 뭘까 고민하게 됐어요. 운전하면서 대금 연주를 자주 듣는데 이 음악이 나를 현실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내 생각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깊은 자아를 건드려 더 나은 나를 만들어주는 음악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음악에 대한 치유적 접근을 좀 더 깊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음악치료 공부를 시작했고, 대금 연주에도 많은 도움이 됐죠.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성찰을 도와주는 도구로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니까요. 음악치료는 주로 클래식을 많이 이용하지만 저는 한국음악을 전공한 한국인이니 국악적 요소로 만들어보려는 거죠.”
대금은 연주자에게 애증의 악기
초등학교 때 단소를 유난히 잘 불던 박경민은 사실 어린 마음에 클래식을 동경해 플루트를 배우고 싶다고 엄마를 졸랐다. 그런데 플루트 입문을 반대하던 엄마가 대신 대금이라도 하게 해달라는 딸의 요청엔 그다음 날로 국립국악고등학교를 찾아가 선생님을 소개받아 왔다. 지금까지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변제남 서울시국악관현악단원이다.
“알고 보니 외할아버지께서 가야금을 타셨더라고요. 그래서인지 국악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어린 나이였지만 내가 잘하는 것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강했고, 스스로 원해서 한 거라 정말 열심히 했어요. 플루트를 못 배운 아쉬움은 전혀 없어요. 이제는 생황을 배워보고 싶어요.”
사실 국악기는 전통 계승의 성격이 강하기에 도제식으로 배우면서 스승의 작은 버릇까지 답습한다. 그러다 보니 자칫 일정한 틀 안에 갇히게 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국악관현악은 현대적인 창작음악을 추구하는 장르이니 맥락이 전혀 다르다. 혹시 전통악기로 현대음악을 한다는 것이 태생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 것 아닐까.
“선생님이 제자에게 자기 색깔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선생님은 반대였어요. 학교 다닐 때 제 산조 책을 보면 색깔이 세 가지죠. 선생님마다 가락이 다 달라요. 정답이 없는 건데, 저희 선생님은 그때그때 제게 맞는 가락을 선택하게 해주셨어요. 그래서 지금 전혀 맥락이 다른 음악을 하면서도 폭넓게 호흡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전통을 잘 배운 사람은 단단함이 달라요. 관악기 주자는 특히 전통이 중요하죠. 가장 상청인 ‘떠이어’를 연주하는 주법 하나만 들어봐도 정악을 잘 불어온 사람은 단단함이 달라요.”
상대적으로 마니아가 많은 클래식에 비해 대중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는 국악 연주자로서 소외감은 없을까. 그는 “‘국악’ 하면 나부터 정악의 지루함이 먼저 떠오르죠”라며 웃었다.
“예전에 비하면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우리만 해도 마니아층 확보나 저변 확대를 위한 노력을 많이 하니까요. 안타깝지만 반짝하고 금세 이루어질 수 없는 문제라 젊은 사람들의 활동이 쌓여야만 할 것 같아요. 그래도 요즘엔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걸 피부로 느껴요. 광고나 드라마에도 국악 선율이 많이 묻어나오고, 무엇보다 국악 시키려는 부모가 많아졌거든요.”
그녀는 이번 음반을 기획하면서 ‘대중성이냐 예술성이냐’의 딜레마에 빠졌다고 했다. 예술성에 치중하면 일반 대중에게서는 멀어질 테고, 그렇다고 듣기 편한 곡으로만 채우고 싶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두 마리 토끼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할까만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 그걸 깨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국악이 대중적인 장르가 되는 것은 시간이 필요한 문제니까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쪽에 집중하게 됐어요. 음반을 준비하는 후배에게도 다른 사람보다 네가 하고 싶은 걸 먼저 찾으라고 조언하고 있어요.”
레퍼토리 확충이 국악계 화두로 꼽히는 만큼, 연주자로서 좋은 창작곡에 대한 갈증도 있을 터. 그녀는 국악관현악곡은 좋은 작곡가도 필요하지만 좋은 지휘자를 만나 완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창작곡은 한 곡을 완성하기 위해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해요. 연주할 때마다 매번 깊이가 달라지거든요. 국악관현악곡도 연주하면서 카타르시스가 터질 때가 있어요. 좋은 곡과 좋은 지휘자가 만났을 때 그렇죠. 다들 훌륭한 연주자들이지만 생각이 각자 다르잖아요. 원석을 다듬어주는 지휘자의 역량이 중요한 것 같아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3월 롯데콘서트홀에서 선보일 ‘양방언과 국립국악관현악단-Into the Light’에 대한 기대도 내비쳤다.
“양방언 선생님의 음악은 고급스러운 대중음악이랄까요. 예술적인데 듣기도 좋은 음악을 만드는 분이 몇 안 되지 않나요. ‘양방언’ 하면 떠오르는 음악이 있다는 게 너무 부럽죠. 연주자에게도 어느 정도 작곡 역량이 필요해요. 내 악기를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러면서 그는 2007년 입단 당시 예술감독이던 고故 황병기 명인의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국악으로 창작음악을 한 1세대로 지금까지 칭송받고 있는 황병기의 음악은 어디에든 어울린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인연을 묻자 눈시울을 붉히며 추억에 젖는다.
“되게 괴짜셨어요. 그 정도 연세면 보통 어른으로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곤 하는데 단원들에게 장난도 많이 치시고, 당시 막내이던 저를 손녀같이 예뻐하셨죠. 설에 인사드리러 가면 해맑게 웃으며 좋아해주시고 세뱃돈도 꼭 챙겨주셨어요. 함께 공연도 많이 했는데요. 어떤 행동이나 말 없이도 대기실 분위기를 푸근하게 만들어주셨죠. 하지만 한없이 푸근하고 좋다가도 음악에서만큼은 확고함이 있으셨어요. 언제나 높은 기준을 끊임없이 요구하셨거든요. 한번은 소리꾼 정은혜 씨와 선생님의 ‘호연지기’라는 곡으로 공연한 적이 있는데, 연습 때 댁으로 찾아가 들려드렸더니 아주 꼼꼼하게 코멘트해주셨죠.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만큼 긴장했던 기억이 잊히지 않네요.”
국립국악관현악단 활동 중에 기억에 남는 작업을 물으니 뜻밖에도 2014년에 시작한 어린이 예술교육 프로그램인 ‘오감오락 음악여행단’에 국립국악관현악단 대표로 참여한 일을 꼽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뿌듯한 추억이라 했다.
“공연이 끝나면 에너지를 다 쏟아낸 뒤의 허탈감이 있거든요. 최상의 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애썼지만 그만큼 잘 전달됐을까 싶기도 하고. 그런데 ‘오감오락 음악여행단’은 첫해에 이름부터 같이 짓고 준비하면서, 국악을 전혀 모르는 아이들에게 국악의 좋은 이미지를 전하는 전도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느꼈고, 그 덕에 열정이 많이 생겼죠. 오히려 공연으로 소진된 에너지를 회복할 수 있었답니다.”
그래서일까. 무대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국립국악관현악단 안에서나 밖에서나 ‘국악 전도사’를 자처하는 박경민의 에너지는 오늘도 백퍼센트 충전 상태다. 주변 사람까지 덩달아 ‘업’시키는 행복한 에너지다.
글 유주현 ‘중앙SUNDAY’공연 담당 기자.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사진 人, The 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