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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호 Vol.347

우리 춤이 초현실과 만나면

리뷰 ㅣ 국립무용단 '더 룸'

 

피핑 톰 무용단을 시작으로 다양한 활동을 보여준 김설진이 국립무용단과 호흡을 맞췄다.

초연임에도 불구하고 기대 이상의 높은 완성도를 보여줬고, 무용수 8명은 각기 다른 매력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2018년 11월 8~10일 |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초현실주의 예술은 무의식이나 꿈 같은 비현실의 세계를 표현한다. 착란과 신비, 꿈의 구상적 표현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초현실주의는 20세기 초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퍼진 예술 사조다. 이는 ‘인간의 상상에 자유를 부여하는 것’으로, 지성을 초월한 꿈이나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함으로써 초현실적인 미를 창조하고자 했다. 오늘날 장 콕토·살바도르 달리·호안 미로·르네 마그리트·막스 에른스트 등의 작품으로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초현실주의는 처음 프랑스와 서유럽에서 펼쳐진 운동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미국으로 망명한 초현실주의자들은 아실 고키·잭슨 폴록 같은 미국 추상표현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이후 아메리카와 아시아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100년 전 시작된 이 예술사조는 오늘날 우리 곁에 친근하게 자리하고 있다. 살바도르 달리의 휘어진 시계를 손목에 차고, 르네 마그리트의 공중 부양 신사를 그려 넣은 우산을 들고 다니기도 하며, 많은 예술가가 진화된 초현실주의 작품을 내놓고 있다.


그렇다면 시공간의 제약, 중력과 신체 능력의 한계를 갖는 무용에서도 초현실주의의 구현이 가능할까? 무용에서는 주로 1980년대 윌리엄 포사이스의 작품을 초현실주의로 꼽는다. 하지만 더 확실한 초현실주의 무용은 벨기에 피핑 톰 무용단에서 볼 수 있다. 피핑 톰 무용단은 영화적 기법을 차용, 무용·음악·연극적 요소를 결합해 장르를 정의할 수 없는 복합적인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리고 안무가가 있으나 무용수·음악가 등 출연자 개개인이 공동 창작자로 참여하는 것이 특징이다.


무대라는 한계를 넘어 마법과 같은 장면을 만들어내는 피핑 톰 무용단은 대표작 ‘반덴브란덴가 32번지’(2009)와 ‘아 루에’(2011)로 각각 2013년과 2015년에 한국을 찾은 바 있다. 두 작품의 중심에는 2008년 피핑 톰 무용단에 입단한 한국인 무용수 김설진이 있다. 2014년 TV 프로그램 ‘댄싱9’ 우승 후 대중의 인기를 얻으며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설진은 안무가로도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201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우수작으로 선정된 ‘방Room’, 2017년 국립현대무용단 ‘쓰리 볼레로’ 초청작 ‘볼레로 만들기’ 등을 통해 안무 역량을 키워온 그는 2018년 국립무용단을 만나 최초의 풀타임 작품 제작에 도전했다. 지난 11월 8일부터 10일까지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된 국립무용단의 신작 ‘더 룸’의 안무가로 참여한 것이다. 그간 국립무용단은 안성수·테로 사리넨·조세 몽탈보·신창호 등 국내외 현대무용 안무가와의 작업을 통해 다양한 레퍼토리를 개발해오고 있는데, 이번 공연은 스타 무용수 김설진의 안무에 대한 기대로 기획됐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김설진은 국립무용단원 개개인의 잠재된 역량을 끌어내는 내밀하고 섬세한 작업으로 그 기대에 답했다.

 

공간에 펼쳐진 다양한 가능성

‘더 룸’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캐스팅된 무용수들이다. 현대춤을 잘 추는 무용수 위주로 구성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훈련장 김미애와 최고참 단원인 김현숙부터 최연소 단원 최호종까지 다양한 연령과 이미지의 무용수 8명을 선정했다. 의외의 조합에 대해 안무가 김설진은 “이보다 더 좋은 조합을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것은 외형적 개성뿐만 아니라 이들의 삶이 영화만큼 극적이고, 그 이야기를 채집해 작품으로 만들기에 충분히 흥미롭다는 말일 것이다.


김설진은 창작에 앞서 국립무용단원들의 개인사를 탐구했다. ‘더 룸’은 인간이 머무는 공간이 품는 다면적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사람에 의해 공유되는 ‘방’이라는 공간은, 김설진이 오랫동안 흥미를 가져온 소재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는 하나의 방을 무용수 8명이 공유하며, 저마다의 사연과 에피소드의 콜라주로 방 안을 채웠다. 때로는 관찰자로, 때로는 삶 그 자체의 상징으로 기능하는 ‘방’은 인간의 기억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다소 특이한 공간이다. ‘더 룸’의 주 무대인 방은 문과 창문, 침대와 소파 등으로 아늑하게 꾸며졌고, 매우 사실적이고 섬세한 소품으로 실존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작품이 진행되면서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사람을 삼키거나 바람을 일으키고, 비밀 공간을 드러낸다. 한 사람이 하나의 이야기만 하지 않기에 여러 이야기가 중첩돼 공존하고, 서로의 이야기에 상대가 되어주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한다. 그 역할 간의 치밀한 조합과 계산된 연출에서 김설진의 영민함이 드러난다.


‘더 룸’은 다분히 영화적이다. 동시에 등장해 있지만 서로 다른 차원에 있는 듯 눈앞의 무용수를 의식하지 않는 설정이나 문·옷장·소파·침대를 이용해 마술처럼 나타나고 사라지는 트릭, 벽지를 뜯어내면 나타나는 미지의 공간 등 평면적인 무대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보이는 방 너머의 시간을 상상하게 한다. 어린아이의 신발을 옮기다가 “현태야!”를 반복적으로 외치는 김미애의 행위처럼 구체적으로 사건을 설명하지 않아도 아이에 관한 아픈 이야기를 추측하게 한다. 이처럼 각각의 이야기는 상징과 은유로 표현된다. 자신을 찾아온 여자를 다정하게 안다가 벽장에 넣기를 반복하는 남자, 인형처럼 굳어 있는 여자, 와인을 마시며 엉켜 있는 연인, ‘태평무’를 추는 여인에게 겹겹이 옷을 입혀주는 남자, 집 안을 어지르는 남자와 그를 묘하게 응징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시간이 뒤엉킨 후에는 각 이야기의 후반부가 이어진다. 연인 관계에서 혼자가 된 남자는 술에 취해 춤을 추고, 젊은 무용수에게 자신의 옷을 내주고 홀로 남은 김현숙은 다른 이들의 위로를 받는다. 그는 무용수에서 엄마가 되어 최호종이 연기한 아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이렇듯 각각의 이야기는 여러 역할과 관계를 만들고, 한자리에 모이면 가족의 모습을 그려내기도 한다. ‘더 룸’은 무용수 8명의 시간과 기억을 바탕으로 구성한 만큼 록부터 블루스까지 음악적으로 자유롭다. 또 극단적인 점프-컷 등 장면의 진행 역시 자유롭다. 물론 자유로운 만큼 어떤 이야기를 어떤 속도와 질감으로 표현해야 조화롭게 구성될지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작품은 초연임에도 불구하고 기대 이상의 높은 완성도를 보여줬고, 무용수 8명은 각기 다른 매력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미 지난봄 신창호의 신작 ‘맨 메이드’에서 독보적 기량을 보여준 최호종의 또 다른 면모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면서 묘기에 가까운 춤을 보여주는 모습은 마치 김설진의 분신과 같았다. 더 보여줄 것이 많은 최호종은 국립무용단의 기대주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대사가 없는 춤 작품임에도 움직임에서 과묵함이 읽히는 남자, 황용천도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고참 단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낼 기회를 얻은 김현숙과 윤성철은 있는 모습 그대로 주목받을 수 있는 절호의 작품을 만난 듯하다.


작품의 후반부, 벽장에서 불어온 바람과 아들의 절규 등 회오리 같은 클라이맥스가 지나고 나면 다시 평온한 일상이 찾아온다. 이때 무대가 천천히 돌아가면서 관객은 작은 창문으로만 방 안의 풍경을 볼 수 있다. 그 집이 무대 뒤로 멀어지면 영화의 줌 아웃이 실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같은 인상을 주는 엔딩이다.

 

 

동시대 국립무용단의 역할
피핑 톰 무용단의 설립자이자 안무가인 프랑크 샤르티에를 만나 김설진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는 “김설진은 예측 불허한 매력과 미스터리한 면이 공존한다. 어릴 때 장난감이 별로 없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매우 창의적으로 소품을 만들곤 한다. 장면에 대해 얘기가 끝난 뒤에도 다음 날 무언가를 만들어 와서 의견을 묻는다. 정말 섬세한 사람이다”라고 설명했다. 피핑 톰 무용단의 작품에 대해서는 “내면을 밖으로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움직임을 찾고자 한다. 그리고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영화의 줌 효과를 어떻게 낼 것인지 연구했고, 음악이나 조명으로 그 방법을 찾았다”라고 했다. 피핑 톰 무용단의 작업 방식은 오랜 시간 함께해온 김설진의 안무에 영향을 미쳤고, 신작 ‘더 룸’에서는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피핑 톰 무용단은 2009년 ‘반덴브란덴가 32번지’를 발표하기 전 ‘정원’ ‘거실’ ‘지하실’이라는 공간 3부작을 만들었다. 하나의 공간에서 여러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연작이고, 이는 2011년 ‘아 루에’의 공간 설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설진이 공동 안무가로 참여한 ‘아 루에’는 오래된 저택의 거실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 작품으로, ‘더 룸’의 이야기 전개와 닮아 있다.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전반을 지배함에도 위트를 놓치지 않은 점, 무용수가 쇼파 속으로 사라지는 인상적인 장면에서 두 작품은 마치 평행이론 같다. 김설진이 추구하는 초현실주의 무용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의 춤 역사에 중요한 부분인 피핑 톰의 작업을 닮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한국무용 단체인 국립무용단에 현대무용 안무가의 작품을 입히는 것이 더 이상 새로운 시도는 아니지만 “왜 현대무용 안무가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발레단인 프랑스 파리 오페라 발레를 종종 예시로 들곤 한다. 파리 오페라 발레는 1671년 창단해 낭만발레의 대표작 ‘지젤’의 오리지널 레퍼토리를 보유한 단체이자 1970년대부터 카롤린 칼송·마츠 에크 같은 안무가와 현대무용 작품을 만들고 있다. 클래식과 컨템퍼러리 작품 중 어느 한쪽을 더 잘하는 무용수는 있겠으나 대부분 양쪽 작품에 모두 출연하는 역량을 발휘하고 있으며, 파리의 관객들은 선호하는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다양성을 누리고 있다. 그들이 따로 국립현대무용단을 두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에 국립무용단 무용수들이 ‘더 룸’을 훌륭히 소화해내는 것을 보면서 이제 국립무용단도 파리 오페라 발레처럼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역량을 가진 무용단이 됐다는 생각이 든다.

 

김예림 예원학교와 서울예술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및 동 대학원에서 무용을 전공했으며, 무용수·안무가·교육자 활동 후 평론가로 등단했다. 현재 월간 ‘춤과 사람들’ 편집위원으로 다양한 지면에 무용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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