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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호 Vol.347

돌아온 탕자 이춘풍

SPECIAL┃고전 소설 파헤치기

 

국립극장의 마당놀이 ‘춘풍이 온다’가 연말연시에 공연된다고 하니 반갑고 즐거움이 앞선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처럼 걸 크러시가 인기인 시대에 이춘풍이라는 허랑방탕한 남자를 혼내주는 여성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춘풍이 온다’는 원작 ‘이춘풍전’의 구조와 주제를 잘 이어받아 시대적인 풍자를 더하고, 맛깔나는 입담을 엮어 관객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채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원작 제목에는 ‘이춘풍’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사실 이 작품은 세상을 당당하게 헤쳐나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춘풍을 둘러싸고 있는 아내와 기생 추월 그들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춘풍과 그의 아내, 추월 세 명이다. 원작 ‘이춘풍전’의 이야기를 먼저 소개하면서 등장인물과 사건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춘풍전’은 조선 말기에 지어진 세태소설로 알려져 있다. 세태소설이라 함은 변화하는 세태를 반영하고 이에 따른 사건과 갈등을 주요하게 다룬 소설을 의미한다. ‘이춘풍전’이 비교적 조선시대 끝자락에 지어진 만큼 작품에 봉건시대의 여러 문제가 드러나고, 변화하는 가치관이나 시대상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이본(異本)은 서울대본·국립도서관본·나손본1-2·성산본·김영석본까지 모두 6종이 발견됐는데 이본 간에 줄거리와 주요 인물·배경·삽화가 대개 일치한다. 조선 후기 ‘배비장전’이나 ‘강릉매화타령’ 등과 같이 판소리의 영향으로 탄생한 소설로 보인다. 상품경제와 자본의 발달 등 근대화 이행기에 놓인 당대의 세태를 재물을 탕진하는 한량 이춘풍을 중심으로 해학적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 경제력을 중심으로 변화하는 여성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데, 문제적 인간이면서 방탕아인 남편을 길들이기 위해 아내의 지혜와 실천이 부각되는 작품이다. 탕아·기생·처의 삼각구도 속에서 ‘이춘풍전’은 처의 역할을 주동자로 두고 기생은 대결적 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바람 같은 춘풍의 하루
이춘풍은 서울 다락골에 사는 사람으로(양반인지 상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장안 거부의 아들이다. 소년 시절부터 방탕해 하는 일이 모두 바람과 같았는데, 부모가 남긴 재산으로 날마다 기생과 노는 것이 일상이다. 남북촌 왈짜들까지 이춘풍을 친구로 둔 덕에 더불어 호의호식, 장취로 세월을 보낸다. 결국 집의 재산이 모두 거덜 나고 빈털터리가 되고 나서야 뒤늦은 후회를 한다. 이춘풍은 그의 아내 김씨에게 대소사를 맡기면서 다시는 주색잡기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다.


김씨는 근면 검소해 바느질길쌈 등을 쉼 없이 하여, 4~5년 내 가세를 풍족하게 만든다. 그러나 춘풍은 아내 덕에 다시 좋은 의복과 맛난 음식을 먹더니 또 교만한 마음이 들었다. 평양에 장사하러 가겠다며 호조 돈 2천 냥을 빌리고 집안 돈 5백 냥까지 챙겨 집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평양으로 간 춘풍은 기생 추월의 미색과 애교에 홀려 가져간 돈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꼴이 된다. 그리하여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추월의 집에서 사환(使喚) 노릇을 하며 근근이 산다.


이때 회계비장으로 변장하고 평양에 온 아내 김씨 덕에 애초에 빌린 돈 2천 냥보다 많은 5천 냥을 추월에게 돌려받는다. 이렇게 춘풍은 구사일생 돈을 얻어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마치 자신이 장사를 해서 이문을 남긴 것처럼 다시 의기양양하게 굴며 상을 차려 내온 아내를 구박하기까지 한다. 결국 김씨는 다시 회계비장으로 변장하고 나타나 본인이 회계비장이었음을 알린다.

 

 

조선 후기 부부 관계의 변화
이춘풍은 방탕한 것을 넘어 문제적 인간으로 설정된다. 그는 유업(遺業)으로 받은 돈을 물 쓰듯이 쓰고 주색잡기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 불량 남편이다. 그를 견제하고 훈육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춘풍의 처뿐이다. 그럼에도 춘풍은 아내를 비하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렇게 아내를 무시하고 가장의 권위로 억압하려고 하는 춘풍의 모습은 가부장제 사회의 뒤틀린 남성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춘풍의 성품이 과연 평양에서 혼쭐이 나서 돌아온 이후 완전히 교정됐을지 장담하기는 어렵다.


반면 춘풍의 처 김씨는 방탕한 남편의 뒷바라지와 집안일을 하며, 삼종의 도리를 지키려고 애쓰는 착한 아내다. 대개의 아내들이 그러하듯 남편이 가정으로 돌아와 성실한 가장의 의무를 다하기를 바랐고, 종신토록 화락하며 금실 좋은 부부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가산을 탕진한 춘풍은 스스로 가장의 권위를 버리며 경제권을 아내에게 넘겼고, 결국 김씨는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 됐다. 이쯤에서 춘풍도 그럭저럭 부인에게 의지해서 살 만도 했다. 그러나 호조에 빚을 지고 평양으로 간 춘풍은 추월에게 빠져 다시 재산을 탕진하고야 만다. 그 소식을 들은 김씨는 또다시 분연히 일어선다.


그녀의 필살기는 남장을 하고 비장의 권한으로 춘풍과 추월을 혼내주는 일이었다. 아내이자 여성이기 때문에 드러낼 수 없었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남성으로 변신해야 했다. 성적 차별을 없애고 능력의 있고 없음을 드러내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차기 평양감사 물망에 오른 도승지댁 대부인에게 아침저녁으로 차담상을 차리면서 지극정성으로 대부인을 보살핀다. 대부인 덕에 김씨는 평양감사를 따라 회계비장으로 가게 된다. 이제 김씨의 계획은 관의 인정을 받은 상태에서 공식적으로 진행된다. 이것은 결국 문제적 남편을 교정하고 치유하려는 아내의 의지를 시대가 용인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또한 여성의 관계(官界) 진출이 비록 비정상적이나마 인정됐다는 점에서 김씨의 처세와 능력을 평가할 수 있다. 결국 김씨는 사회적 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자신이 원하는 비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으며, 이러한 능력은 비장의 임무를 수행할 때에도 동일하게 이어졌다.


김씨는 걸인이 된 춘풍을 잡아다 형틀에 매고 친다. 죄목은 호조 돈을 갚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실상 외피를 벗고 보면 그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호통치는 것이며 매를 때리는 것이다. 이로써 그간의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전도된다. 매 맞던 아내 김씨는 회계비장으로 변신함으로써 방탕한 남편을 호통치고 때리는 위치로 역전된다. 권력 앞에서 한없이 초라한, 무능한 남편의 실상이 남김없이 폭로된다. 아내는 결국 남복을 통해서 자신의 여성성을 지우고 남편을 징치(懲治)한 것이다. 이는 결국 가정 안의 부부 형상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관념 속에서 위선적인 질서를 요구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능력 있는 아내와 무능한 남편의 실상을 김씨는 관권 획득을 통해서 보여준다.


집에 돌아와서도 아내에게 여전히 허세를 부리는 춘풍의 모습은 변하지 않는 가장의 권위 의식과 위선을 보여준다. 다시 비장으로 변장한 김씨에게 비굴하게 조아리는 춘풍에게서도 부정적인 가부장의 전모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반면 김씨는 모든 면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슈퍼우먼 아줌마 캐릭터다. 남편과 아이들, 가족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힘을 발휘한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바람난 남편, 가정을 등한시하는 남편을 통쾌하게 징치하는 동시에 바람직한 인간형으로 교정해 다시 가정을 회복시킨다는 점이다. 남성의 전유물이던 관리가 됨으로써 남편의 허세와 무능력을 질타했으며, 가정 내에서 그 위선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수모와 굴욕을 줌으로써 깨닫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김씨는 남편을 버리거나 징치하는 것을 넘어서 바람직한 가장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춘풍전’은 이처럼 허세 많고 무능한 가장 이춘풍을 교정해 가정으로 복귀시키는 아내 김씨의 역할을 크게 부각하는 작품이다. 조선 후기 부부 관계의 변화, 특히 아내의 위상이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화끈함에서 얻는 통쾌함
마당놀이 ‘춘풍이 온다’에서는 원작의 큰 줄거리를 따라가지만 몇 가지 변화된 지점이 있다. 먼저 이춘풍이 이진사의 아들로 설정되며,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 김씨와 사는 것으로 설정된다. 춘풍의 허랑방탕한 성격을 늘 걱정하던 어머니 김씨는 자신의 몸종 오목이를 며느리로 맞아들인다. 오목이와 춘풍의 결합은 천민과 양반의 결합이라는 면에서 오히려 더욱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데, 오목이는 오히려 ‘사람 잘 치고 바지 잘 벗기는 애’로 묘사될 만큼 당당하고 거리낌 없는 캐릭터다. 평양에서 재산을 탕진한 춘풍과 추월을 혼내기 위해 비장으로 변복하고 평양감사를 따라가서는 이들을 잡아들여 곤장을 때리고 무려 5만 냥을 받아낸다. 오목이는 집으로 돌아와 춘풍을 기다리는데, 춘풍이 다시 거짓으로 허세를 부리자 사령들을 불러 매질을 하고 춘풍을 쫓아낸다. 춘풍의 아내 오목이는 “부인? 부인 같은 소리 하네! 누가 자네 부인이야? 나, 이거 안 해. 못 해!”라고 당당히 외친다. 그리고 싹싹 비는 춘풍을 엄히 훈계하면서 데리고 산다는 것으로 결말을 짓는다. 원작의 결말이 춘풍 처의 순응적인 태도로 끝났다면, 마당놀이의 결말은 아직 반성이 부족한 춘풍에게 다시 곤장을 때리는 화끈한 결말이다. 따라서 오목이의 활약상을 따라가면서 관객은 통쾌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한편 소설과 달리 이춘풍 이야기를 감칠맛 나게 전해줄 꼭두쇠는 이야기 곳곳에서 등장인물과 대화를 나누며 사건을 전개해나간다. 꼭두쇠는 관객과 소통하고 주인공과도 이야기하면서 극의 전개를 이끌 것이다. 꼭두쇠가 전해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큰 소리로 추임새를 넣는 것도 잊지 말자.


무엇보다 마당놀이의 진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현재의 모습을 곳곳에서 풍자하고 해학적으로 전해주는 데 있다. 이야기의 전개 중 우리 시대의 정치·사회·생활상이 반영되어 탄성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 밖에도 마당놀이 특유의 흥겨운 노래와 춤, 등장인물들의 유쾌한 연기가 어우러져 어느 때보다도 신명 나는 한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제 우리가 이춘풍을 보러 가는 일만 남았다.

 

최혜진 목원대학교 교양교육부 교수. 판소리와 판소리 문학에 대해 주로 연구하며 고전문학과 전통예술 전반에 대해 다양한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전문위원, 대전국악방송 금요일 ‘국악산책’ 진행자로도 활약하고 있다.
그림 권수정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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