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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호 Vol.345

음악가의 마당

우리 시대의 작곡가┃강준일(1944~2015)

‘마당’이란 그를 대표하는 작품 제목이기도 하지만, 작곡가로서 강준일이 견지한 이념이기도 하다. 그는 마당을 닦았고, 그곳으로 여러 악기와 수많은 음악가를 불러들였다. 음악적 화두는 고독하게 던졌으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는 이들의 연대가 있었다.


강준일의 대표작은 1983년 초연된 사물놀이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마당’이다. 농악에서 뽑아낸 음악적 추출물로 만든 사물놀이 리듬의 진한 농축액이 서양식 관현악단의 여러 악기와 만나 흘러가는 곡이다. 작품의 성공과 함께 강준일은 ‘마당’의 작곡가로 통했다. ‘마당’이란 작품명이기도 했지만, 그가 작곡가로서 견지한 이념이기도 하다. 그는 마당을 닦았고, 그곳으로 여러 악기와 수많은 음악가를 불러들였다. 단 한 번의 만남일지라도 만남을 관류하는 내적 논리를 탐색했고, 그것을 공식화해 다음 곡에 적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개별적이면서도 전작의 논리와 공식을 입고 있다.

 

 

 

독학의 작곡가와 서울음악학회
강준일은 1944년 12월, 충청남도 서천에서 태어났다. 은행원으로 근무한 아버지는 교회 성가대에서 지휘자로 활동했다. 그 덕분에 늘 곁에는 음악이 있었다. 서울고등학교 밴드부에서 음악과 함께 살던 강준일은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물리학과를 다니다가 1966년에 음대 작곡과로 옮겨 공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물리학과로 돌아와 1969년에 졸업장을 받았다. 이러한 전력 때문인지 그는 생전에 곧잘 음악을 물리학에 비유하곤 했다. 어떤 원리나 공식을 현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작곡과 물리학의 방식이 유사하다고 본 것이다.


독학으로 작곡에 뜻을 둔 그의 초기 모습은 예술가보다 현장을 일구고 지키는 문화운동가에 더 가깝다. 1970년 발족한 서울음악학회(Seoul Musicians’ Academy)와 그 활동이 이를 잘 대변한다. 서울음악학회는 강준일을 비롯해 지휘자 금난새·임헌정, 기획자 강준혁(강준일의 동생) 등 당시 대학생들과 갓 졸업한 이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모임이자 캠프다. 이들은 연주·창작·지휘 등을 진지하게 공부했다. 1969년 서울국제현대음악제라는 이름으로 ‘범음악제’가 처음 열려 현대음악에 대한 갈증을 느낀 젊은 작곡가들이 목을 축이던 때였고, 유학 후 귀국한 작곡가들이 서양음악의 ‘무조건적인 수용’에 대한 반성적 의식을 회복하는 흐름을 만들던 때였다.


강준일이 2002년에 내놓은 저서 ‘음악에로의 입문’은 그때 공부한 흔적을 모은 것이다. 아쉽게도 당시 젊은 음악가들의 모임이었기에 지금은 변변한 사료조차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음악학자 이희경은 “1970년대 이들의 의미는 두드러지지 않지만 오늘날 음악계의 진지한 중견 연주자들로서 자리 잡은 이들의 모습을 보면 이 모임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라고 평한다.


1975년, 서울음악학회 멤버들이 하나둘 유학을 떠나며 활동이 축소되자 강준일은 본격적으로 작곡에 매진했다. 무용 모음곡 ‘무영탑’(1975)을 썼고, 발레 모음곡 ‘봄’(1976)을 쓰며 스트라빈스키처럼 파격적인 무용음악 전문 작곡가를 꿈꾸기도 했다. 다양한 편곡 작업과 무용곡을 다룬 1970년대 습작기를 지나, 1980년대 초 양악과 국악을 아우르며 그의 이름은 급부상하기 시작한다. 바로 ‘강준일표’라 할 수 있는 사물놀이 협주곡 ‘푸리’(1983)와 ‘마당’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전통음악에 눈뜬 순간들
‘푸리’와 ‘마당’은 사물놀이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이다. 두 작품이 나오는 데는 당시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기획관으로 근무하며 보이지 않는 산파 역할을 한 동생 강준택이 있었다.

 

한편 강준일은 비올라·첼로·피아노·타악기·소리를 위한 ‘만가’(1982)를 발표하기도 했다. 훗날 그는 이 작품에 대해 ‘평생의 음악을 위한 주제’를 던져준 곡이라고 회고한 적이 있는데, ‘만가’와 ‘마당’을 비교하는 그의 시선은 꽤나 흥미롭다.

“‘만가’의 특징은 상당히 선적이다. 굉장히 많은 것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음악이 단 하나의 선을 타고 계속 지나간다. 반면 ‘마당’은 굉장히 리듬이 풍부하고, 입체적이고 그 리듬이 점점 발전해 무엇인가를 향해서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만가’와 ‘마당’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 초반은 고민 회로에서 맴돌던 사유와 실천의 에너지가 터져 나온 때인 셈이다. 이어서 그는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적 소묘 ‘난파회상’(1984)을 통해 이 땅에 태어나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했을 선배 작곡가 홍난파와 그의 작품을 새롭게 들여다보기도 했다.


‘마당’ 이후로도 그의 사물놀이 시리즈는 이어졌다. ‘환희의 노래’(1984), ‘판굿’(1984), 현을 위한 ‘살풀이’(1990), ‘팡파레 '95’(1995) 등은 사물놀이가 관악합주, 현·금관악기 등과 만나는 작품이다. 또한 공식을 통해 물리 세계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물리학도처럼 ‘전통’과 ‘한국음악’은 점점 그의 음악 공식이 돼갔다. 10간과 12지 사상을 응용해 사물놀이와 관현악을 위한 ‘풍물굿’(1994), 사물놀이와 피아노를 위한 ‘열두거리’(1984)를 작곡하기도 했다. 특히 ‘풍물굿’은 ‘만가’를 이루는 선(線)적 특성과 ‘열두거리’를 일구는 점(點) 단위의 장단 패턴을 모두 활용한 것이다.


당시 한 평론가가 그에 대해 “어느 누구와도 다른 자기의 섬을 가지고 있는 고독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습작기를 끝낸 그의 곁에는 여러 음악가가 늘 함께했다. 1981년 시작된 김덕수와의 만남으로 ‘마당’을 낳았고, 1982년에는 진쇠춤의 이동안을 만나는가 하면, 1987년 서울예술단 창단공연 ‘새불’의 음악을 김영재(해금·거문고)와 함께 맡기도 했다. 음악극 ‘우리들의 사랑’(1987)과 ‘구로동 연가’(1988)는 작곡가 이건용·김철호와 함께했다. 한국음악에 대한 화두는 고독하게 던졌지만,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늘 연대의 모색 속에서 진행된 것이다.


이처럼 여러 만남이 있기까지는 많은 사건이 있었다. 먼저, 그가 습작을 일삼던 1970년대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다. 농촌재건운동을 위해 정부는 무상으로 시멘트를 지급했고, 근면·자조 등을 강조했다. 마을에 전승되던 전통문화는 시멘트로 덮였고, 풍류는 근면에 의해 추방되곤 했다. 전통음악의 운명 역시 풍전등화였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으로 재직하던 최순우는 가락동인회를 만들었다. 전통예술인을 초청해 공연을 열어 그 가치를 이어가려 한 것이다. 젊은 강준일은 여기서 명인을 모시는 허드렛일을 도왔다. 기회가 되면 대담도 나누고 녹음도 했다. 이것이 첫 번째 계기라면, 두 번째는 1978년 공간사랑에서 태어난 사물놀이와의 만남이었다. 전통음악에 눈뜬 작은 순간들이지만, 그 틈으로 들어온 빛은 무척 강렬했나 보다.


강준일은 1986년 서울예술단(당시 ‘88서울예술단’으로 출범)에 잠시 적을 두었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음악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광장보다 여러 음악 공식을 실험할 수 있는 자신만의 실험실을 사랑했다. 작업에 매진하기 위해 경기도 여주에 작업실을 얻었다. 마을의 논을 지나 작은 언덕 옆에 자리 잡은 집이었다. 직접 장작을 패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서 2006년까지 여러 작품을 발표한다.

 

 

작곡가의 마당에서 한국음악을 올려다보다
1990년대에 작곡한 작품은 서양악기를 위한 곡이 많다. 그렇다고 서양식 문법을 따라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양악기를 이용해 우리의 소리와 감성을 탐색하고 양식화했다. 그는 늘 ‘우리가 듣고 살던 자연스러운 소리’와 ‘그것과 무관하게 교육을 통해 알게 된 서양음악’을 반성하는 자세로 작품에 정진했다. 그래서 서양악기를 사용하되, 내용은 전통문화에 기대 있다. 세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삼행절곡’(1990), 더블베이스와 피아노를 위한 ‘짧은가락’(1990), 현악 합주를 위한 ‘옛 이야기’(1991), 경기민요에 의한 ‘소곡’(1993),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조곡 ‘아리랑’(1993), 클라리넷 독주곡 ‘허튼소리’(1998), 바이올린 협주곡 ‘슬픈노래’(1998) 등이 여기에 속한다.


1970년대 습작기를 거쳐 전통을 모색하던 1980년대, 그리고 양식화를 시도한 1990년대를 지나, 강준일의 2000년대는 한마디로 어울림의 시대였다. 그는 새로운 천년을 ‘천년천세지곡’(2000)으로 열었다. 지휘자 정치용과 서울시향이 초연한 이 작품은 ‘수제천’ ‘대취타’ 등 정악과 민요를 토대로 한 곡이다. 이를 기점으로 그의 작품에서 가야금과 현악 4중주, 해금과 바이올린, 클라리넷과 대금이 소리의 머리를 맞대곤 했다. 이른바 강준일의 마당이 펼쳐진 것이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은 피아노·첼로·장구를 위한 3중주 ‘해맞이 굿’(2001)이다. 1998년 첼리스트 요요 마가 만든 실크로드 앙상블은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세계 각지의 저명한 작곡가에게 동서양이 만난 실크로드처럼 아시아와 서양음악이 어우러지는 작품을 위촉했다. 한국을 대표해 강준일이 선정됐고, 그는 요요 마의 첼로에서 아쟁의 울음소리를 끄집어냈다. 이후 극적 칸타타 ‘백범 김구’(2002), 국악관현악 ‘하나 되어’(2005), 클라리넷 독주곡 ‘석조’(2007) 등을 작곡했다. 2007년에는 새 작업실을 지었고, 그곳에서 100년이 넘은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놓고 작업했다고 알려진다.


2015년 3월 5일, 그러니까 그가 세상을 뜨기 며칠 전 마주 앉은 적이 있다. 4월에 있을 ‘임헌정과 국립국악관현악단’ 공연에 오를 그의 작품 ‘내 나라, 금수강산..’(2015)과 관련해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요새 제 구실을 못하는 국악관현악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피력했고, 살짝 그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강준일은 이렇게 말했다. “국악관현악이 단순히 주어와 동사만을 구사하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문학적인 기교로 표현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내 나라, 금수강산..’은 이런 믿음하에 쓴 것이다.” 그러면서 며칠 전에 봤다는 영화 ‘국제시장’에 담긴 자기 세대의 자화상도 털어놓았다. 우리는 오로지 발전의 희망만을 품고 달려온 세대였다고. 그때 그의 생각과 말은 그가 고인이 된 후 이 땅의 음악을 향하는 유언처럼 녹음 파일에 남아 있다.


생각해보면 그는 늘 한 단계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작품을 쓴 작곡가가 아니었나 싶다. 바로 눈앞의 목표물과 그 사이의 간극. 그 간극을 뛰어넘고자 욕심낼 때, 연주자도 작품도 작곡가도 성장하는 법이다. 그 대표적인 곡이 국악관현악 ‘하나 되어’(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위촉)로, 단원들의 기량 향상을 위한 곡이라고 했다. 이처럼 그는 ‘한 단계’를 올려다본 트레이너형 작곡가였다. 한국음악이 게을러질 때마다 자신의 마당으로 불러 훈계하고, 그 극복의 원리와 공식을 연구한 작곡물리학도였던 것이다.

 

*작품에 기재된 작곡 연도는 강준일기념사업회 ‘마당’ 웹사이트(kangjoonil.com)에 기재된 내용을 따릅니다.

 

송현민 음악평론가. 음악을 듣고 글을 쓰며 부지런히 객석과 책상을 오가고 있다. 급변하는 음악 생태계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 미래를 ‘기획’하는 자료가 된다는 믿음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 박현근 | 그림 권준 일러스트레이터

 

참고문헌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한국현대 예술사대계IV’, 2004.

‘구희서의 예술가 읽기-작곡가 강준일’, 월간 ‘객석’ 2000년 11월호. 

이희경 ‘작곡가 강준일의 음악 세계-미래악회 강연 원고’, 2008.

 

국립국악원 한국의 음악, 창작음악II ‘소리, 하나 되어’
작곡가 강준일의 공식 음반은 없다. 하지만 많은 음악가가 아낀 작곡가였기에 그의 작품은 여러 음반에 나뉘어 잘 담겨 있다.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의 음반에는 ‘하나 되어’가 수록돼 있다. 단원들의 기량 향상을 위한 곡인 만큼 악기별 독특한 독주와 전체를 아우르는 합주가 대비되는 형식이 눈에 띈다. 이 곡은 일반적인 관현악 편성으로 작곡됐지만, 음량의 대비와 다이내믹을 위해 악단에 따라 생황, 대·저피리, 해금, 대·소아쟁을 보완한 편성으로 연주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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