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에서 크리스토퍼 휠던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초월해 고전과 현대 예술의 동행을 추구하는 볼쇼이극장.
새로운 시즌의 개막을 알린 러시아 예술의 자존심 볼쇼이극장의 문을 두드린다.
볼쇼이, 러시아 공연예술의 서막을 알리다
1776년 3월 28일 제정 러시아의 황제 예카테리나 2세의 명으로 설립된 볼쇼이극장은 오랜 기간 예술의 변방에 자리하던 러시아를 단숨에 예술의 중심에 서게 했다. 서구 예술을 수용하며 발레와 오페라에 눈을 뜬 러시아 예술가들은 자국의 고유한 예술적, 정서적 토대 위에 유럽의 신예술을 정립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때 오페라극장이라 불린 볼쇼이극장은 과거 세 차례의 화재로 위기를 경험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8개의 웅장한 석주와 아폴론의 사두마차가 장식된 현재의 본관 건물은 1853년 마지막 화재가 발생한 3년 뒤인 1856년 8월 20일에 소실된 건물 자리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이후 볼쇼이극장은 연승가도를 달린다. 벨리니의 ‘청교도’를 재개관 기념작으로 올린 후, 1869년 마리우스 페티파가 안무한 ‘돈키호테’를 상연하며 극장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으며, 연이은 ‘지젤’ 상연과 율리우스 라이징거가 안무한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초연은 볼쇼이극장에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게 했다. 아쉽게도 ‘백조의 호수’는 초연 당시 흥행에 실패하지만 세간의 이목을 끄는 데는 한몫을 단단히 했다. 이 작품은 이후 페티파와 그의 제자 레프 이바노프에 의해 섬세하게 다듬어져 마린스키극장에 다시 오른다.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극장과 쌍벽을 이루던 볼쇼이극장은 1917년 혁명을 거치며 소비에트 시기와 대면한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잠시 멈칫하던 볼쇼이의 레퍼토리는 오히려 소비에트 최초 오페라 상연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으며, 러시아 국민음악파, 즉 글린카와 보로딘, 무소륵스키 등 거장들이 빚어낸 희대의 명작을 꾸준히 선보이며 세계 최고의 예술극장으로 거듭났다. 현재 볼쇼이극장은 크게 4개의 공연 홀로 구성돼 있다. 모스크바극장 광장 중심에 서 있는 본관은 2014년 보수공사 후 재개관하며 전통적인 오페라·발레 공연 레퍼토리를 잇고 있으며, 본관에서 모든 작품을 수용할 수 없기에 건물 왼편으로 신관과 별관 격인 포크롭스키홀과 베토벤홀을 증축해 더 많은 관객과 호흡을 나누고 있다.
243번째 시즌 레퍼토리
이번 시즌 볼쇼이극장 레퍼토리에는 총 26편의 오페라와 37편의 발레 작품이 예정돼 있다. 볼쇼이극장을 연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르는 단연 발레다. 그중에서도 ‘백조의 호수’는 볼쇼이극장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라 하겠다. 이번 시즌 이 작품은 공교롭게도 9월과 10월에만 몇 차례 무대에 오르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시기를 놓치면 올해가 끝날 때까지 볼쇼이 백조들의 군무를 보기 힘들 것이다. 이외에도 ‘라바야데르’ ‘라실피드’ ‘돈키호테’, 존 크랭코의 ‘오네긴’,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재편한 ‘지젤’ ‘스파르타쿠스’, 존 노이마이어의 ‘안나 카레니나’, 조지 발란신의 ‘보석’, 윌리엄 포사이스의 ‘가공품(Artifact)’ 등이 발레 레퍼토리를 풍성하게 엮고 있다.
주목받는 오페라 공연으로는 무소륵스키의 작품이자 러시아의 대문호 푸시킨이 쓴 희곡이 원작인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가 있다. 세계 오페라 무대의 진주와 같은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작품은 1948년에 초연을 했으며 오늘날까지도 러시아 관객에게 커다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이와 함께 러시아 민중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비극적 오페라 ‘황제의 약혼녀’와 ‘오셀로’ ‘일 트로바토레’ ‘돌 손님’ ‘피가로의 결혼’ ‘마술피리’ ‘검찰관’ 등이 레퍼토리에 올라 있다.
또한 올해는 20세기 거장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레너드 번스타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를 기리기 위한 특별한 콘서트가 준비되어 있으며, 주말에는 아동들을 위한 오페라와 공연도 즐비하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오페라 레퍼토리의 경우 서유럽의 고전 명작들 사이로 순수 러시아 문학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상당수 등장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러시아 문학에서 차용한 모티프를 가지고 무대화한 오페라가 돋보인다. 문학과 회화, 연극과 발레를 막론하고 러시아 예술은 푸시킨에서 출발해 고골과 톨스토이로 이어져오는 문학적 토양에서 생성된 모티프를 한 단계 더 성숙한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가령 소설 ‘안나 카레니나’가 그럴 터이고 고골의 ‘검찰관’이 그러하다. 푸시킨의 작품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발레와 오페라 무대에 올라, 심지어 외국 관람객 가운데는 원작이 소설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오페라 또한 이러한 시류에 힘을 실어 러시아 예술계 전반에 오랫동안 이어져오던 나름의 법칙을 더욱 공고히 한다. 이번 시즌을 꾸려나가는 극장의 총감독 블라디미르 우린과 음악감독 투간 소키에프, 그리고 발레단장 마하르 바지예프가 입을 모아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꾀한 새로운 시도와 쇼스타코비치·라흐마니노프·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이 무대에 오르게 되었음을 시즌 초부터 언급한 데는 그 나름의 까닭이 있었을 터다.
그러나 발레 레퍼토리에서 양상은 이와 사뭇 다르다. 오페라가 유럽 걸작과 러시아 고전 사이에서 조화를 찾았다면 발레는 고전과 컨템퍼러리 사이의 조화를 탐색하는 특징을 보인다.
발레 레퍼토리에는 그야말로 변화의 바람이 분다. 이번 시즌 볼쇼이 발레단은 새로 작업한 발레 작품 6편을 선보이는데, 그 가운데 특히 ‘페트루슈카’는 최초로 선보이는 작품이라 더욱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아울러 아직 제목도 확정되지 않은 ‘크라사빈-사모두로프(Krasavin-Samodurov)’는 러시아 최대 공연 축제인 ‘황금 마스크 축제’에서 여러 차례 수상한 바 있는 뱌체슬라프 사모두로프가 음악을 맡았는데 아직까지도 어떤 음악을 쓸지 고민 중이라 한다. 초연을 보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음악을 가늠하지 못할 테니 더욱 호기심을 자극한다.
모던 발레의 진수, 크리스토퍼 휠던의 ‘겨울 이야기’
이번 시즌 가장 이슈가 되는 발레 작품으로는 ‘겨울 이야기’가 있다. 질투에 눈이 멀어 가족을 비극에 빠뜨린 레온테스 왕과 헤르미오네 왕비, 그리고 보헤미아의 왕 폴리세네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겨울 이야기’는 2016년 국내에서도 국립극단의 연극으로 상연된 바 있어 국내 관객에게는 제목부터 더욱 친숙하다.
안무를 맡은 세계적인 발레 안무가 크리스토퍼 휠던은 끊임없는 관심과 조명 사례에 눈이 부실 정도다. 과거 희곡 ‘햄릿’을 모티프로 한 ‘자비(Misericordes)’를 볼쇼이 무대에 올려 갈채를 받은 바 있는 그는 이번 시즌을 맞아 또 다른 셰익스피어 희곡에서 착안한 발레 ‘겨울 이야기’를 선보이고자 한다. 음악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호흡을 맞춘 조비 탤벗이 맡는다.
사실 이 작품은 휠던의 지휘 아래 2014년 런던 코번트 가든 로열 오페라하우스에서 상연된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유명세를 날리고 있다. 자신이 읽고 감명받은 원작 소설 작품들을 무대화해 발레로 승화시키는 휠던은 2014년 로열 발레에서 ‘겨울 이야기’를 초연했다. 희곡 자체에 대한 난해한 해석과 발레화에 대한 문제로 무대에 오르기 힘들 거라 생각한 당시의 견해와 달리, 휠던은 세련되면서도 정돈된 자신의 안무적 특성을 잘 살려 ‘겨울 이야기’에 고스란히 담아놓았다.
영국 로열 발레 학교와 로열 발레를 거쳐 뉴욕 시티 발레에서 전속무용가로 활동한 그는 볼쇼이극장과 이미 10여 년 넘게 인연을 이어왔다. 2004년 ‘신데렐라’를 공연하며 볼쇼이 발레단과 대면한 그는 러·미 수교 200주년을 맞이한 2007년 볼쇼이 발레의 예술감독이던 알렉세이 라트만스키의 초청을 받아 ‘자비’를 무대에 올리게 된다. 이 작품은 관객과 전 세계 비평가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으며 러시아 발레의 새로운 면모와 대중성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다. 동시에 ‘신데렐라’ ‘로미오와 줄리엣’ ‘알라딘’과 같이 최근 각광받는 스토리 발레 작품에 또 하나의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휠던은 발레와 뮤지컬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두각을 보였는데, 특히 발레 분야에서는 뉴욕 시티 발레를 위해 만든 ‘모포시스(Morphoses)’와 ‘폴리포니아(Polyphonia)’,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발레단을 위해 창작한 작품 ‘콘티뉴엄(Continuum)’이 유명하다.
볼쇼이 무대에서 ‘겨울 이야기’는 시즌의 끝 무렵인 이듬해 4월에 예정되어 있는데, 그러다 보니 아직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기에 작품의 귀추가 더욱 주목된다.
어쩌면 우리의 상상 속에서 볼쇼이극장은 흰 발레복의 백조들이 우아한 동작을 선보이는 곳으로만 한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영하의 추위 속 순백의 눈으로 덮인 모스크바에서 발레를 감상하는 것은 그 자체로 더없는 낭만이자 정서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준다. 이 또한 볼쇼이가 가진 모습임은 명징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관객은 243번째 시즌을 열며 볼쇼이극장이 야심만만하게 배면에 드러낸 ‘혁신’이란 또 하나의 얼굴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전통과 혁신이란 화두는 러시아 예술계에 늘 따라다니는 숙제와도 같다. 어쩌면 이는 당대를 살아가는 동시대 예술인 모두에게 당면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유독 이번 시즌 볼쇼이극장은 전통적 레퍼토리 사이에 실험적이고 현대적인 작품을 촘촘히 깔아두었다. 이를 통해 보수적인 러시아 관객의 시선을 한결 미래 지향적으로 돌려놓고자 각고를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판단은 늘 관객의 몫이니. 작품에 대한 더없는 애정으로 시즌 내내 더 많은 관객이 볼쇼이극장과 동행하길 기대해본다.
글 박정곤 러시아 국립 연극예술원RATI-GITIS에서 수학했으며, 모스크바 고리키 문학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모스크바에 거주하며,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