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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8월호 Vol.343

시대의 아방가르드

우리 시대의 작곡가┃황병기(1936~2018)

역사는 그를 가야금의 명인으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가야금’으로만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석一昔이 무색하게 아방가르드를 거듭해온 황병기의 일생을 돌이켜본다.

 

 

 

올해 1월 31일, 황병기는 점잖은 어르신의 모습으로 고인이 됐다. 그는 생전에 파격과 일탈을 일삼은 전사로 살아왔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라는 레테르letter가 그 역할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을 볼 때 ‘미궁’(1975)이란 작품이 맥락과 뿌리 없이 나온 해프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그를 ‘가야금 창작의 위인’으로만 기억하는 역사는 답답하다. 그를 기린다고 가야금 음악만을 나열하는 음악회도 솔직히 좀 답답하다. 다시 말하면, 그의 삶은 가야금이라는 깔때기로만 모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법과 음악, 생활인과 예술가
황병기는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누나와 나이 차이가 열여섯 나는 귀한 종손이었다. 경기중학교에 재학하던 때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가야금을 처음 잡은 것은 피난지 부산에서였다. 전쟁 중이었기에 나라가 언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는 절실한 마음으로 가야금을 배웠다. 방과 후에는 늘 국립국악원으로 향했다. 김영윤에게서 정악가야금을, 김윤덕에게서 산조가야금을 배웠다.


경기고 재학 중에는 덕성여대에서 주최한 제1회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이던 1956년에는 KBS가 주최한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입상했다. 대학 입학 후에는 심상건으로부터 산조를, 나원화로부터 남창가곡 한바탕을 사사하기도 했다. 스스로 만든 커리큘럼을 통해 전통음악의 자양분을 빨아들이던 때였다.


대학을 졸업하던 1959년 서울대에 국악과가 개설됐고, 강의를 맡게 됐다. 훗날 서울대 교수를 지낸 이재숙과 김정자는 그때의 제자들이다.
1960년대에 황병기의 활동과 호기심은 다방면으로 뻗어나갔다. 1961년 한국교향악단 창단공연(지휘 임원식)에 그는 좀 특별한 연주자로 함께했다. 그가 협연한 정회갑의 ‘가야고와 관현악을 위한 주제와 협주곡’(1961)이 가야금과 서양관현악단을 위한 곡이었기 때문이다.


황병기가 국악 작곡을 시작한 해는 1962년이다. 이해에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에 선율을 붙여 동명의 작품을 발표했다. 1963년에는 가야금 독주곡 ‘숲’을 발표했다. 오늘날 ‘가야금 창작의 효시’라 일컬어지는 ‘숲’은 4장 구성이다. 1장 ‘녹음’과 4장 ‘달빛’은 정악에 뿌리를 두었고, 2장 ‘뻐꾸기’와 3장 ‘비’는 민속악, 그중에서도 산조의 원동原動이 느껴진다. 1970년에 현대무용가 육완순은 이 곡을 자신의 작품에 배경음악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황병기는 ‘숲’을 시작으로 ‘가을’(1963), ‘석류집’(1963), ‘가라도’(1968)를 세상에 내놓으며 작곡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한편 1960년대 초반에 스트라빈스키(1882~1971)의 ‘봄의 제전’(1913)을 들은 후에는 서양 현대음악에 빠져들었다. 황병기는 “기성인은 물론이요 급진적이라는 젊은이들도 18세기나 19세기의 소나타·교향곡·오페라만을 들으면서 스스로 현대음향예술 속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음악 풍토”(‘경향신문’ 1971년 9월 21일 자, ‘충격의 조화 국제 현대음악제를 듣고-황병기’)를 비판하며 나아갔다. 작곡은 이러한 생각과 반성에 따른 움직임이었다. 백병동·강석희·도널드 서(서영세)·앨런 호바네스 등 서양음악을 주업으로 한 작곡가들과 친교를 맺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국악계의 선후배 관계로부터 자유로웠던 그는 여타 장르와 국경을 활발히 넘나들었다. 유치진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1964년 컬러 영화 ‘가야금’(감독 권영순)에선 음악을 맡았다. 우륵 역으로 김진규가 섰고, 김지미·신영균·신성일 등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출연했다. 1965년에는 황병기의 첫 음반이 나왔다. 미국 하와이대학교 동서센터(East-West Center)가 주도한 음반에는 ‘숲’ ‘가을’ ‘석류집’, 그리고 가야금 산조가 수록됐다. ‘석류집’은 1965년 호놀룰루의 현대음악제에서 본인에 의해 공연되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자유에 대해 훗날 이렇게 고백했다. 1974년 이화여대 한국음악과에서 교편을 잡기 전까지의 시절에 대해 “음악과 관계없는 일을 할수록 더욱 몰두한” 때였다며, “실업에서 이탈된 음악인인 동시에 음악에서 이탈된 실업인”으로 “양쪽 모두로부터 소외된 존재였다”라고 말했다. 그는 1964년 협신물산주식회사의 상무이사로 재직하며 명동극장을 운영했고, 1967년 태흥화학공업주식회사 기획관리실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1968년 보림영화사와 1970년 도서출판 문조사를 세워 대표를 맡기도 했다. 문조사 시절에는 알베르 카뮈 전집을 내놓았다. 우리가 잘 모르던 황병기의 삶이다. 중요한 것은 가야금과 음악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대음악의 새로운 기수
결국 1974년,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하면서 그에게 주전공이 생겼다. 황병기는 ‘침향무’(1974)를 시작으로 ‘미궁’ ‘비단길’(1977), ‘아이보개’(1978), ‘전설’(1979), ‘영목’(1979) 등을 발표했다.


이 중 ‘침향무’와 ‘미궁’은 당시 통용되던 문법으로부터 거친 탈주의 궤적을 그린 작품이다. ‘침향무’는 당시의 관점으로 보면 향(香)처럼 ‘은은한 아방가르드’였다. 이 작품은 가야금과 장구 연주자에게 다양한 기술을 요구한다. 양손을 사용해 현을 뜯고, 다섯 번째 손가락부터 퉁기고, 두 개의 줄을 동시에 울린다. 현을 비벼 소리 내고, 장구 연주자는 채로 북통을 치거나 손가락으로 두드리기도 한다. 반면, ‘미궁’은 ‘하드보일드 아방가르드’다. 이 작품은 김수근이 운영한 ‘공간사’에서 발행하던 잡지 ‘공간(空間)’의 100호를 맞아 위촉한 작품이다. 건축계의 모더니스트 김수근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현대음악제를 개최했다. 당시 뉴욕에서 활동하던 홍신자는 춤을 출 때에도 괴상한 인성(人聲)을 사용했다. 그녀가 ‘미궁’의 주인공이 된 중요한 이유다. ‘미궁’에서 홍신자는 웃고 울고 절규하고 신음한다. 발음이 부서진 소리는 음악과 문화라는 인간의 문명으로 마름질되기 이전의 소리다. 황병기는 활로 가야금 현을 두드리거나 문지른다. 장구채로는 공명판의 뒤를 문지르고, 술대를 현 사이에 끼워 앞뒤로 퉁긴다. 가야금의 머리 부분을 목탁처럼 두드리기도 한다. 두 사람은 음악이 한 번도 가지 않은, 전인미답의 길을 걸었다.


1970년대, “현대음악은 괴상망측한 것이라고만 생각해서 ‘그런 걸 뭐하러 들어’ 하고 일축해버리는 풍조도 이제는 조금씩 달라져가는” 시기에 그는 현대음악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73년 국제현대음악협회ISCM 한국지부 사무국장으로 일했고, 1974년 네덜란드 로테르담 현대음악제(ISCM World Music Days Festival)에 참여하기도 했다. 1978년 열린 제3회 범음악제에서 황병기의 공연 모습을 보자.


“황씨가 벌떡 일어서면서 박을 들고 힘껏 몇 번 치자 음악은 시작됐다. 때리고 치고 퉁기고 긁고 흔들고 눌러대고 목소리를 내 울고 불기까지 한다. (…) 연극을 보는 재미도 곁들인다. (…) 가야금을 세워놓곤 뒷전에서 한이 맺힌 듯 울어대기도 하고 한가로이 앉아 담배도 피워 물고 코도 풀곤 한다.”(‘동아일보’ 1978년 11월 18일 자, ‘뿌리내리는 현대음악’)


1979년에는 독일 자르브뤼켄 방송이 주최하는 현대음악제에 황병기와 작곡가 박영희가 공동 초청되기도 했다. 그에게 이 시기는 우리 옛것을 알리기보다 ‘오늘의 것 알기’를 실천하던 때였다. 따라서 황병기의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국악사의 일탈적 장보다 한국 현대음악의 정식적인 장으로 다뤄져야 한다.

 

국경과 분단의 역사를 넘다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문호가 국제적으로 넓어졌다. 이 시기에 황병기는 ‘하림성’(1982), ‘밤의 소리’(1985), ‘남도환상곡’(1988), ‘소엽산방’(1990) 등을 발표했다. 가야금 작품만 발표하던 예전과 달리 ‘하림성’은 대금 독주를, ‘소엽산방’은 거문고 독주를 위한 작품이었다. 조선의 안중식이 그린 ‘성재수간도(聲在樹間圖)’로부터 악상을 길어 올려 ‘밤의 소리’(1985)를 내놓기도 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백남준은 ‘바이 바이 키플링’을 발표했다. 인도 출신의 영국 시인 러디어드 키플링이 “동양과 서양은 결코 만날 수 없다”라고 한 주장이 틀렸음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담은 영상이 백남준의 소재가 됐다. 김영임이 부르는 ‘노들강변’에 맞춰 한강변의 풀물이 영상에 잡히기도 했다. 황병기는 뉴욕 스튜디오에 직접 출연해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 백남준은 이러한 면면을 모아 한국의 과거·현재·미래를 위한 총체의 부분으로 활용했다.


이 시기에 황병기는 산조에 매진했다. 1988년 ‘남도환상곡’은 산조를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다. ‘남도환상곡’ 이전에 산조에 바탕을 둔 작품은 없었다. “산조의 성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산조를 바탕에 두고 뭘 좀 해보려고 하면 그대로 산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일으킨 국제화와 개방화의 물결은 한반도의 잘린 허리를 넘었다. 1988년 월북 예술가에 대한 해금 조치가 발표되자 그들의 존재와 작품이 조명되기 시작했다. 당시 학계에서 파악한 월북 음악가는 약 30명. 황병기는 그중 정남희(1905~1984)의 가락을 바탕으로 1989년 정남희제 김윤덕류 산조를 발표했다.


1979년 자르브뤼켄 음악제에서 윤이상을 만나고, 1989년 정남희제 가락을 발표한 영향 때문이었을까. 황병기는 1990년 북녘 땅을 밟았다. 윤이상을 주축으로 한 범민족통일음악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됐고, 황병기는 서울전통음악연주단의 단장이 됐다. 이들은 평양음악단(단장 김원균)과 함께 10월 18일부터 23일까지 평양 2.8문화회관(현 4.25문화회관)·봉화예술극장 등 6개 공연장에서 공연했다. 남한 측 음악인 14명과 기자단 3명 등 민간인이 판문점을 통과해 북한에 입국했다.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방북 음악회였다. 이외에 1994년 ‘국악의 해’ 조직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는 등 1990년대에 그는 여러 현장의 살림을 꾸렸다.


물론 그 시기에 작곡도 놓지 않았다. 1995년 박종원 감독의 영화 ‘영원한 제국’의 음악을 담당했고, ‘춘설’(1991), ‘달하 노피곰’(1996), ‘시계탑’(1999)을 발표했다. 1997년에는 정남희제 황병기류 산조를 발표했다.

 

말년, 안목의 아방가르드
‘황병기제 아방가르드’의 또 다른 말은 ‘안목의 아방가르드’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으로 재직하면서 그는 안정적 행정보다 과감한 선택과 기용의 묘를 택했다. 일탈의 수가 놓일수록 악단의 분위기는 이상하게도 안정됐다. 대표적인 경우가 재독작곡가 정일련의 발굴이다. 그로 인해 국립국악관현악단은 현대음악적 문법을 구사하는 작곡가와의 호흡에 걸림돌이 없다.


역사는 그를 가야금의 명인으로만 기억한다. 그가 고인이 되던 날, 여러 장르의 예인들이 추모의 꽃을 들고 장례식장을 찾았다. 모두들 그와 진하게 만나 과감히 놀던 이들이다. 만약 그곳에 폭탄이라도 떨어졌다면 ‘한국 국악사’가 아니라 ‘한국 예술사’의 중허리가 날아갔으리라. 고인을 기리는 음악회가 9월, 국립극장에서 펼쳐진다. 그때의 객석 역시 다양한 예술가로 채워질 것이다.

 

*작품에 기재된 작곡 연도는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의 ‘한국 작곡가 사전’과 국립국악원의 ‘한국음악 창작곡 작품목록집’을 따릅니다.

 

송현민 음악평론가. 음악을 듣고 글을 쓰며 부지런히 객석과 책상을 오가고 있다. 급변하는 음악 생태계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 미래를 ‘기획’하는 자료가 된다는 믿음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 제공 한말숙 | 그림 권준 일러스트레이터
참고문헌 나효신 ‘황병기와의 대화’, 풀빛, 2001. 박용구 ‘오늘의 초상’, 일지사, 1989. 송방송 ‘증보 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황병기 ‘오동 천년, 탄금 60년’,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월간 ‘공간’, 1975년 9월호.

 

음반 ‘황병기 제3 작품집-미궁’
1993년 황병기의 세 번째 작품집으로 나온 음반이다. 2001년에 새롭게 나왔다. ‘미궁’ 외에 그의 첫 작품인 ‘국화 옆에서’, 가야금이 아닌 대금 독주곡 ‘산운’(1981)이 수록돼 있다. ‘미궁’의 성격으로 보나, 가야금 곡으로만 구성된 다른 앨범에 비교한다면 ‘황병기 외전’이라 할 만하다. ‘미궁’ 때문에 밤에 트는 것이 금물(?)이 된 앨범이지만, ‘미궁’이 끝나고 ‘국화 옆에서’로 트랙이 넘어갈 때의 접점이 묘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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