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네비게이션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빠른예매 바로가기 사이트 지도 바로가기
월간미르 상세

2018년 08월호 Vol.343

고대 그리스, 케이팝을 만나다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유럽 3개국 투어

초연 당시 한국 창극사에 기록될 소중한 수작으로 평가받은 ‘트로이의 여인들’이 유럽 무대에 올랐다.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 유럽 관객은 한恨을 노래하는 우리 소리를 어떻게 느꼈을까.

국립창극단은 지난 6월 한 달간 영국 런던·네덜란드 암스테르담·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저명한 페스티벌의 초청을 받아 대표 레퍼토리 ‘트로이의 여인들’을 공연했다. 국립극장과 싱가포르예술축제가 공동 제작한 ‘트로이의 여인들’은 2016년 11월 국내 초연 이후 2017년 9월 싱가포르 무대에 오른 바 있다. 영국·네덜란드·오스트리아 모두 이제껏 창극이 공연된 적 없기에 국립창극단이 그 시작을 알렸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6월 2?3일 양일간 ‘트로이의 여인들’은 영국 런던국제연극제(London International Festival of Theatre)를 장식했다. 올해 4월 리노베이션을 마치고 새롭게 문을 연 사우스뱅크 센터 퀸 엘리자베스 홀 무대에서였다. 이어 8일부터 10일까지 네덜란드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공연예술축제인 홀란트 페스티벌(Holland Festival)에 참여해 뮈지크헤바우 흐로터 잘(메인홀)에서 공연했다. 투어의 종착지인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동한 뒤에는 16일부터 18일까지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빈 페스티벌(Wiener Festwochen) 무대를 장식했다. 오스트리아 공영방송 ORF에 게재된 리뷰를 통해 창극에 쏟아진 유럽 관객의 반응을 살펴보자.(편집자 주)

 

 

빈 페스티벌 마지막 주간에는 다시 고대 그리스비극으로 되돌아간다. 한국 전통 창극 형식으로 각색된 고대 그리스비극 ‘트로이의 여인들’이다. 고대 그리스와 케이팝K-Pop 사운드 사이에서 일어난 음악이 빈에 거대한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다.


싱가포르 출신 연출가 옹켕센이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주요하게 다룬 두 개의 감정은 ‘비애’와 ‘분노’다. 무대는 미니멀리즘과 고요가 지배한다. 흰옷을 차려입은 배우들은 손에 쥔 빨간 실뭉치를 천천히 풀고 있다. 그 앞에는 왕비 헤큐바(김금미)가 미동도 없이 바닥에 누워 있다.
하지만 곧 헤큐바의 첫 번째 소리와 함께 트로이의 노래로 이루어진 두 시간의 여정이 시작된다. 연출가 옹켕센은 그리스에 승리를 가져다 준 ‘트로이의 목마’ 책략 이후 트로이의 여성들이 맞게 되는 운명을 소재로 한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을 작품의 토대로 삼았다. 이 작품은 그간 다양하게 각색됐다. 그중에서도 장 폴 사르트르는 전쟁에 대한 비판을 담아 작품을 재해석하고 현대로 가져왔다. 옹켕센은 이러한 사르트르의 작품을 사용해 한국의 전통 오페라, 즉 창극에 적합한 형태로 연출했다.

 

소리 높여 외치는 트로이 여인들의 운명
감정을 뚫고 지나가는, 거의 쉰 듯한 김금미의 목소리는 관객이 트로이의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공감하게 한다. 10년간의 전쟁 탓에 남편과 아들을 잃은 헤큐바는 이제 여인들, 딸 카산드라(이소연), 며느리 안드로마케(김지숙)와 함께 전쟁의 전리품으로 넘겨지길 앞두고 있다.
한국 창극이 기반하고 있는 전통 판소리와 마찬가지로, 각 여성배우는 북장단에 맞춰 독창을 한다. 옹켕센의 연출에서 북은 공연의 상당 부분에 지속적으로 활용된다. 오케스트라 피트에 배치된 한국의 전통 악기들이 유럽 무대와는 상당히 다른 음향을 만들어낸다. 케이팝 음악은 8인으로 구성된 코러스가 노래할 때 점점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작곡가 정재일의 작품이다.


정신이 맑아질 정도로 하얀 무대에서 시작해 원소들을 하나씩 투사함으로써 관객을 점점 극으로 끌어들인다. 물이 한 번, 돌이 한 번씩 투사된다. 카산드라가 등장하면서 무대 배경에선 화염이 일어나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옹켕센의 작품에선 조명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조명은 단지 무대 위에 머물지 않고 객석에도 비친다. 게다가 몇몇 배우가 객석에 있는 문을 통해 출입하기 때문에 종종 객석의 조명도 눈이 부시게 밝아진다.

 

 

유럽과 한국이 공유하는 것
이어지는 여정에서 한국의 창극과 그리스의 고대 비극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흰옷은 원전인 그리스비극과 아시아의 전통을 잇는 시각적 가교 역할을 한다. 관객을 사로잡는 압도적인 음량의 비가(悲歌)는 연민을 통한 영혼의 정화라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역할을 수행한다.


남성 배우가 연기한 헬레네(김준수)가 등장할 즈음, 옹켕센은 에우리피데스의 원전에 부분적으로 강력한 키치를 삽입해 동시대적 특색을 제시한다. 피아노 반주와 함께 헬레네는 메넬라우스(최호성)의 심장을 향해 노래하고, 이 장면에서 감정적인 절정에 다다른다.
옹켕센은 작품 속에서 헬레네를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로 표현했다. 그녀는 그리스인 사이에서도, 트로이 여성들 사이에서도 추방당한다. 연출가는 에우리피데스의 원작에서 이미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여성들의 운명에 강렬하게 천착함으로써 헬레네를 통해 나타나는 이러한 모순을 젠더 관점에서 바라봤다.

 

트로이는 아시아에 있다
‘트로이의 여인들’ 각색본에서 사르트르는 소아시아에 위치한 트로이와 유럽의 갈등에 초점을 맞춰 그리스비극을 당시 베트남전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포장했다. 옹켕센은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을 통해 고대 그리스를 유럽의 의미적 주권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러면서도 사르트르가 남긴 전쟁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침해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전쟁 속 살아남은 여성들의 투쟁은 2500여 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시사성을 지니고 있다.

 

 

자막 없이도 강렬한
무엇보다도 ‘트로이의 여인들’은 슬픔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든다. 옹켕센은 여성들의 소리를 작품의 중심에 두었고, 배우들도 트로이 여성들의 고통을 너무나도 절절하게 전달함으로써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두 시간가량의 공연이 끝난 후 배우들은 물론 관객도 모두 탈진했다. 무대로부터 시작된 힘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싱가포르 출신의 연출가 옹켕센은 자신이 만든 강렬한 버전의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로 관객에게 다가가는 데 성공했다. 국립창극단은 오스트리아 빈 초연 공연에서 격렬한 기립박수 세례를 받았다. 공연에 독일어 자막이 삽입되기는 했지만, 여성들의 운명을 너무나도 강렬하게 전달한 나머지 자막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다.

 

플로리안 보크(Florian Bock)
번역 황연수 | 사진 박용우
원문 오스트리아 국영방송 ORF, 2018년 6월 17일 자, ?Trojan Women“: Antike trifft K-Pop

사이트 지도

사이트 지도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