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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6월호 Vol. 341

'특수'하되 '보편'적인 음악을 향해

우리 시대의 작곡가┃백대웅(1943~2011)

 

 

그는 한국음악을 둘러싼 ‘옳은 것’과 ‘틀린 것’을 고민하며 작곡 활동뿐 아니라 스무 권 넘는 책을 집필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한 작곡가의 특수한 지론뿐만 아니라 창작국악이 가져야 할 보편성을 되새긴다.


시를 잘 쓰는 시인이 있고, 시의 설계도 격인 시론(詩論)을 잘 쓰는 시인이 있다. 백대웅(1943~2011)은 후자에 가깝다. 그는 음악의 설계도라 할 수 있는 음악론을 많이 썼다. 그 어느 작곡가보다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글을 써 책으로 남겼다. 거기에 쓴소리도 많이 담았다. 그래서 만년에 펴낸 ‘전통음악의 랑그와 빠홀’(2003), ‘전통음악의 이면과 공감’(2004), ‘전통음악의 보편성과 당위성’(2005), ‘전통음악의 흐름과 역동성’(2006), ‘전통음악의 비판적 수용과 한국음악’(2006), ‘전통음악사의 재인식’(2007)은 백대웅의 ‘쓴소리 전집’이라 해도 될 것이다.
활자 속 그의 언성은 불과 같다. 뜨겁고, 화끈하다. 불을 품은 물은 술과 같다. 하지만 그 술을 마신 독자는 이상하게도 한 잔의 차를 들이켠 것처럼 창작국악에 대해 차분히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이 수많은 논지가 그의 최종 목적지이고, 창작은 그것을 위한 실험 과정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국악에 무관심했던 국악 전공자
1943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한 백대웅은 1961년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 음악대학 국악과에 (그의 표현에 의하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입학했다. 작곡과(서양음악)를 지망한 10명의 학생 중 5명을 국악과로 보냈는데, 그곳에 백대웅이 포함된 것이다. 당시 서울대 국악과는 설립 초창기여서 교과과정이 확립되지 못했고, 그는 국악에 관한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졸업 과제곡도 서양 오케스트라 형식으로 제출했다. 1966년에 대학을 졸업한 그는 해병대에 입대했고, 5여단 및 사령부 군악대장으로 재직했다. 이러한 환경은 그가 즐기던 서양음악의 연장선이었다.


퇴역 후 그는 1971년 한국방송공사(KBS)에 입사했다. 1960~70년대에 ‘후라이보이’라는 예명으로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끈 곽규석, 한국 가곡계의 슈퍼스타 엄정행, 작곡가 장일남 등과 함께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런 그에게 국악은 여전히 곁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문화재이던 만정 김소희(1917~1995)의 ‘심청가’를 녹화 하던 때였다. 그 자리에 명창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심청이 선인을 따라가는 대목부터 범피중류 대목까지였다. 백대웅은 당시의 심정을 저서 ‘인간과 음악’(2006)에 이렇게 적고 있다.
“녹화를 끝내면 보통은 뒷일 처리에 바쁘기 마련이지만 그날은 나도 이상스러우리만큼 한참 그냥 자리에 있었습니다. 판소리가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를 분명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의 나에게는 ‘이유’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는 녹화한 음악을 복사해 집으로 가져가 채보하기로 했다. ‘채보(採譜)’란 소리를 악보로 옮기는 일이다. 자신의 가슴에 와닿은 가락들을 악보에 펼쳐놓으면 짜임새가 보일 테고, 이를 통해 감동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채보를 끝낸 백대웅은 그 악보를 들고 김소희를 찾아갔다. 백대웅은 그것을 보며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김소희는 “성음은 호랭이가 물어가 버리고, 길하고 장단은 꼭 맞소”라고 답했다. 음정과 박자는 맞지만 판소리답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이후 김소희는 그를 아꼈다. 열정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백대웅에게 저녁밥도 해주며 제자 아닌 제자로 대우했고, 명고수 김명환(1913~1989)과 다리를 놓아주기도 했다. 김명환도 백대웅의 질문과 발걸음을 반겼다. 백대웅은 소리북을 배우며 그 가르침과 육성을 카세트테이프 80여 개에 남겼다.


늦공부의 물길이 거세지자 그는 35세가 넘어 서울대 대학원 국악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와 졸업을 위한 논문 쓰기는 학과의 분위기와 늘 어긋났다. 그래서 졸업논문을 세 편이나 썼다. 그러고 나서 ‘민속음악의 선법적 양상-남도음악에 기하여’로 석사학위를 받고 1981년에 졸업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 백대웅은 본격적으로 창작곡을 발표했다. 졸업한 해 11월, 서울대 음대 제23회 정기연주회에서 관현악 ‘판놀음’, 12월 제4회 창작국악발표회에서 ‘세 악기를 위한 두 개의 장(章)’을 발표했다. 늦깎이 작곡가가 된 그는 관현악을 위한 산조 ‘용상’(1987), ‘이연이를 위한 3개의 악장’(1989), 실내악곡 ‘세 악기를 위한 두 개의 장’(1981), ‘우조길에 의한 가야고 산조’(1982) 등을 발표했다. 1984년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국악과 교수로 임용된 후에는 ‘다섯 악기를 위한 만·중·삭’(1984), ‘회혼례를 위한 시나위’(1985), ‘3대의 가야금을 위한 3개의 변주곡’(1989) 등을 발표했다. 그중 1986년 제8회 대한민국작곡상 우수상 수상작인 ‘회혼례를 위한 시나위’는 백대웅과 인연이 깊은 철학자 김용옥 부모의 회혼례를 위한 곡이었다.

 


생전에 토론과 공부하기를 즐긴 그는 다양한 모임을 통해 여러 예술인과 교류하며 음악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갖고자 노력했다. 1981년에는 김명환의 호 ‘일산一山’을 딴 일산회를 조직해 판소리와 고법을 연구했는데, 백대웅을 비롯해 이보형·문재숙·김해숙·오용록·정회천·김일륜 등이 함께했다. 1982년에는 정약용이 지은 악서(樂書)인 ‘악서고존’을 함께 읽으며 한국음악을 연구하는 악서고회(樂書孤會)에서 김용옥·송방송·이성천·박범훈·권오성·최종민·최태현·김해숙·양승희·문재숙·손진책·이병욱 등과 함께했다. 이 모임은 10여 년 가까이 이어졌다.

 

전통에 대한 민감한 반응, 과감한 반항
백대웅은 ‘반응’과 ‘반항’의 작곡가였다. 판소리와 고법을 체득해 민속음악에 ‘반응’했고, 때로는 그 물줄기에 ‘반항’하며 작곡에 임했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가야금을 본격 독립시켜 다룬 ‘우조길에 의한 가야고 산조’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국악이 계면조 중심으로 된 것에 대한 그의 반항심이 잘 나타난 곡이며, 동시에 담백한 우조의 색채가 짙게 배어 있다. 산조의 특징인 길바꿈(전조) 기법도 적극 차용했다. 하여 우조의 신발을 신은 선율이 담담히 걸어간다. 그 발걸음은 가끔 계면길을 걷기도 한다. 하지만 제목처럼 보폭과 보행은 우조를 유지한다. 일곱 차례의 길바꿈을 통해 산조의 기능과 우조의 특색을 잘 보여준 이 곡은 후에 ‘17현금을 위한 짧은 산조’(1991)로 개작됐다.


그의 작품은 새로운 연주 형태를 낳기도 했다. 세 대의 가야금을 위한 ‘상주모심기 노래’(1988)를 발표했을 때, 국악계의 관심과 방점은 ‘세 대의 가야금’에 찍혔다. 창작국악 역사에 고·중·저음 가야금으로 편성된 ‘가야금 3중주’라는 연주 형태가 처음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후 백대웅은 ‘가야금 3중주’ 전문 작곡가로 활동했다. 세 대의 가야금을 위한 ‘사물놀이’(1990)에서도 북·장구·징·꽹과리 등 타악기에 내재된 리듬감을 현 위로 옮겨놓았다.


1989년에 박현숙·김해숙·김일륜으로 결성된 서울 새울 가야금 삼중주단은 백대웅의 음악적 페르소나와도 같았다. 이들이 1992년에 내놓은 음반에는 김희조·전순희·백대웅의 작품 10곡이 수록돼 있는데, 백대웅이 가야금 3중주를 위해 편곡한 파헬벨의 ‘캐논’이 국악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백대웅은 “한국 전통음악이 근대의 서양음악과 다른 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 우리에게 높이가 다른 음이 동시에 어울리는 서양의 화음은 분명 생소하고도 충격적인 요소”라며, “높이가 다른 음이 동시에 울리는 화음의 효과는 서양 사람들에게만 이해되는 미적 가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해당 음반의 해설 참조) 이는 분명 국악만의 특수한 음악적 성질을 간과한 태도였다. 당연히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작곡가 이성천(1936~2003)은 “그의 학문적 태도의 배경은 오랜 기간 익혀왔던 서양음악이라 할 수 있지만, 국악과 관계된 여러 이론들이 그 특수성에 한정되는 것을 비판했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창작국악의 ‘옳은 것’과 ‘틀린 것’
백대웅은 1987년에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한국음악과로 적을 옮겼다. 당시 중앙대에 재직 중이던 박범훈은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민간 악단인 중앙국악관현악단을 창단했고, 백대웅은 악단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첼로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88), ‘북청사자놀음’(1990), ‘남도 굿거리’(1990)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많이 들고 운영에 신경 써야 하는 관현악단보다, 국악의 앙상블 훈련과 레퍼토리 확보 등을 위해서 실속 있는 실내악단이 훨씬 필요하다는 결론”(‘전통음악의 흐름과 역동성’, 2006)을 얻는다. 그러고 나서 가야금을 중심으로 한 실내악에 주력했다. 가야금 3중주 ‘강강술래 변주곡’(1992), 가야금과 현악 4중주를 위한 ‘신관동별곡’(1994), 가야금 3중주를 위한 ‘봄의 리듬’(1997), 다섯 악기를 위한 ‘화(和)’(1998)와 ‘몽금포타령’(1999)은 모두 이러한 결과물이다.


그는 저서 ‘인간과 음악’에서 “음악에는 국경이 없다는 음악의 보편성”과 “그러나 음악가에게는 조국이 있다고 말하는 음악의 특수성”에 대해 “한 면만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 옳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모두 틀린 것이 될 수도 있어요”라고 했다. 이 생각은 삶의 후반으로 가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이 1993년 개교하고, 산하의 전통예술원이 1998년에 개원할 때 그는 전통예술원장으로 부임했고, 2008년 퇴임했다. 10년의 시간 동안 그는 한국음악을 둘러싼 ‘옳은 것’과 ‘틀린 것’을 고민하며 이 글의 첫머리에 상기한 책을 집필했다. 이 책들은 한 작곡가의 특수한 지론일 뿐이지만, 한편으로는 창작국악이 가져야 할 보편성을 되새기는 자료라고 생각한다. 이후 백대웅은 정년퇴임하고 3년 뒤인 2011년에 별세했다. 모두가 그의 짧은 생을 아쉬워했고, 그의 ‘쓴소리’를 그리워했다.

 

* 작품에 기재된 작곡 연도는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의 ‘한국 작곡가 사전’과 국립국악원의 ‘한국음악 창작곡 작품목록집’을 따릅니다.

 

송현민 음악평론가. 음악을 듣고 글을 쓰며 부지런히 객석과 책상을 오가고 있다. 급변하는 음악 생태계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 미래를 ‘기획’하는 자료가 된다는 믿음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 제공 계성원 | 그림 권준 일러스트레이터

참고문헌 한명희·송혜진·윤중강 ‘우리 국악 100년’, 현암사, 2001.
백대웅 ‘전통음악의 보편성과 당위성’, 지식산업사, 2005.
백대웅 ‘인간과 음악’, 어울림, 2006.

 

음반 ‘서울 새울 가야금 삼중주단’&김해숙 ‘가야금을 위한 악상’


1989년 결성한 서울 새울 가야금 삼중주단이 1992년에 선보인 이 음반은 창작국악의 중요한 일면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이들은 새로운 연주 ‘형식’이 ‘작품’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음반에는 백대웅이 작곡한 가야금 3중주 ‘사물놀이’ ‘파헬벨의 캐논’ ‘자바’, 그리고 ‘세 개의 변주’가 수록돼 있다. 작곡가의 작품이 연주자의 표현 형식을 건드린 셈이며, 역으로 연주자의 그것이 작곡가에게 상상력을 불어넣은 셈이다. ‘가야금을 위한 악상’(백대웅 작곡집) 음반은 백대웅과 함께 전통예술원에서 근무한 김해숙이 작곡가가 서거한 2011년에 낸 것이다. 초기작 ‘17현 가야금을 위한 짧은 산조’부터 만년작인 ‘화和’까지 백대웅이 지은 가야금 창작곡의 흐름과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음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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