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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6월호 Vol. 341

공동체 문화와 집단 사유의 꽃

시즌인문학┃제주민요의 과거와 현재

 

 

지리적 격절, 척박한 환경, 외세의 침입…. 고된 역사와 환경 속에서 제주 사람들은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다지고 노래로 흥을 돋웠다. 제주민요는 제주의 사회문화적 기록이자 시(詩)다.


노(老)교수님은 글자 크기 8포인트가량, 촘촘하게 써내려간 320쪽 분량의 ‘문학개설’을 한 학기 내내 달랑 30쪽 강의하셨다. 5,800원이나 되는 교재 값이 아까워 밑줄 그어가며 끝까지 읽었건만 기억은 옹색하기만 하다. 한데 신기하게도 30쪽까지의 내용-원시종합예술 단계에서는 음악이나 민속무용이 문학적 요소와 혼융돼 있었는데 음악적인 것과 무용적인 것이 분화되고, 이어 음악에서 문학이 분리돼 음송시(吟誦詩)가 되었다는 ‘문학의 본질’-만큼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일리아드’나 ‘시경’에 수록된 음송시는 호메로스나 공자 같은 위대한 지성을 만나 기록되면서 고대 사람들의 철학·역사·문학을 새긴 인문 고전의 상징이 됐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음송시는 무(無)문자 시대와 한자의 유입, 삶과 지식의 불화 시대를 건너오면서 오랜 세월 동안 구전시(口傳詩)로서 민요의 길을 걸어야 했다. ‘민족 얼의 보금자리’ ‘내면생활의 거울’ ‘인간 지적 활동의 제일보’ ‘예술적 발현원’ 같은 찬사와 함께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근현대에 와서의 일이다.

 

제주의 역사와 삶이 기록된 노래
제주는 독립국이었던 탐라국 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 중앙에 예속된 이후 오랫동안 ‘외딴섬’ ‘귀양섬’ ‘변방’으로 인식돼왔다. 지리적 격절, 협소하고 척박한 농지, 잦은 풍수해 등 자연 조건과 공납·부역, 출륙 금지령, 외세의 침입, 유배객의 유입 등 사회·역사적 요인 속에서 제주 사람들은 중앙의 지원이나 돌봄에서 소외된 채 자강불식(한문 윗첨자로→)自强不息해야 하는 숙명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 산물인 제주민요는 역사와 현실의 여정에서 일어난 감흥, 삶의 이치, 응어리진 마음을 토로하려는 욕구가 표출된 노래시로, 빼어난 문학성과 역사성을 지닌다.


제주 사람들은 섬이라는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사돈의 팔촌’으로 엮이며 ‘당공동체(친족공동체)’를 형성했다. 한마을 내에 공존하는 성펜당(성가친척)·외펜당(외가친척)·시당(시가친척)·처당(처가친척)은 명절이나 혼례·상례뿐만 아니라 노동이나 일상생활에서 의례·제의 공동체, 노동 공동체, 생업 공동체, 생활 공동체 등 얽히고설킨 다원적 공동체를 형성했고 혼인에 의해 이웃 마을로 확장되면서 지역 공동체로 결속했다. 각 공동체는 농경·어로를 비롯해 마소의 방목이나 바다밭의 해산물 공동 채취 등 공유 자원의 이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접(계)’을 조직해 동등하게 접촉하고 유대 관계를 맺으며 상부상조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했다.


또한, 제주 사회에서는 세시·날씨·형편에 맞춘 집약적이고 효율적인 집단 운영, 한정된 자원의 평화로운 이용과 분배, 사회·현실 문제의 합리적 해결 등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서 노동, 의례, 대소사를 비롯한 삶의 전 영역에서 ‘수눌음(품앗이)’이라는 협부(協扶) 조직이 보편화했다. 김매기, 밭밟기, 꼴베기, 나무 내리기, 나무 자르기, 방앗돌 굴리기, 상여매기, 산담 쌓기, 초가집 집줄놓기, 가뭄에 물 길어 나르기, 멸치 후리기 등 생업·의식·생활 곳곳에 뿌리 깊이 정착한 수눌음 관행은 강력한 사회규범이자 행동 강령으로 빛을 발했다. 수눌음은 다양한 제주민요를 형성하고 전승 집단을 유지했으며, 전도(全道)적으로 고른 분포를 보이며 지속적으로 발달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제주민요 중에서도 특히 노동요는 종류가 다양하고 양적으로 풍부하다. ‘따비질소리’ ‘흑벙에부수는소리’ ‘밧리는소리(밭밟는소리)’ ‘검질매는소리(김매는소리)’ ‘마당질소리’ ‘가레가는소리(맷돌 가는 소리)’ ‘물질소리(네젓는소리)’ 등은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사회 운용의 원리에 힘입어 발달한 노래들로, 노동의 기능과 특징뿐만 아니라 독특한 생업 방식을 반영하고 있어 제주 문화사를 조명하는 민속지(ethnography)로서도 소중한 위상을 지닌다.

 

신명 나게, 자유롭게, 진정성을 담아 부르다
수눌음 집단의 화합을 위해 필요했던 만큼 제주 노동요는 구조적으로 혼자 부를 수 없다. ‘이 소리로 우기멍 가자’ ‘이 소리로 일심동력헙서’ ‘역군님네덜 다말가찌 모다나듭서’ 서로 독려하는 가운데 노동의 시간은 집단 신명의 시간으로 바뀌고, 노동의 정서와 노래의 정서가 일치를 이루는 소리 공동체의 미적 체험은 생활의 신명으로 승화됐다. 동일 집단에 소속돼 일과 소리를 함께 하면서 공유하는 ‘우리는 하나’라는 경험이야말로 공동체 성원으로서 운명적 동질감을 확인하는 중요한 사회문화적 행위였다. 어떤 위치에 있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이 우대받는 풍토가 마련됐고, 유능한 소리꾼일수록 노동의 완급을 지혜롭게 조율할 줄 아는 역량을 지니게 됐다. 제주의 풍토에서 일 잘하는 사람이 대체로 노래도 잘 부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제주민요가 수눌음에 기반을 두고 형성된 만큼 강한 집단성을 띠면서도 요종을 가리지 않고 ‘각자 부르기’ 방식이 발달해 있는 점은 독특하다. 선소리에 뒷소리를 받아서 흥을 살리는 것이 노동요의 특징이기에 선후창 방식을 취하면서도 하나의 가창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소리꾼의 자질, 소리판의 구성, 연행 상황과 성격 등에 따라 ‘서로 주고받으며 부르기’ ‘끼어들어 부르기’ ‘돌려가며 부르기’ ‘이어 부르기’ 등의 방식이 정해진 규칙이나 순서 없이 즉흥적이고 자유롭게 운용된다. 가창자와 청중이 시시때때로 입장을 바꿔가며 각자의 레퍼토리를 노래하는 시끌벅적한 소리판이 형성되는 지점에서 노동과 놀이가 통합되고 흥과 신명은 최고로 살아난다. ‘같이 또 따로 부르기’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제주민요의 미적 체험 양식은 개별성과 독자성이 전체 속에 묻혀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집단 속의 개인’을 인정하려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제주 사회의 인식 체계와 맥이 닿아 있다.


팔순을 넘긴, 진정한 제주민요 보유자들의 음절과 라임과 운용 질서를 따라가다 보면 현대의 시인들보다 훨씬 더 시적이고 지적인 언어 부림을 마주하게 된다. 특히, 자주적이고 근면한 모습, 현실에 패배하지 않고 삶의 진보를 이루려는 강인함, 도전하고 실천하는 정신과 기백 등 인생 도처의 상수들, 즉 제주 여성들의 철학과 사유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세계적으로 제주 여성만이 보유하고 전승해온 ‘물질소리’는 생의 비장함과 진정성을 아로새긴 살아있는 인문 정신의 증표다. ‘해녀’로 알려진 제주 여성들의 바다밭 진출과 삶터의 확장은 생존 전략과 사회 운영의 묘를 넘어 노동력과 경제력 확보를 통한 사회참여와 역할 분담의 비중 확대, 부자와 가난한 자의 평등, 진취적인 의식구조, 실리적인 문화 풍토를 마련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바 그 내용은 민요 사설 곳곳에 투영되었다.

 

민초들의 입으로 불리고, 이어질
제주민요는 제주 사람들의 사고와 인식, 생활양식 등을 공유하면서 집단의 사유를 고양하고 사회를 유지시키는 담론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구술 매체다. 어머니에게서 딸로 전승되면서 공동체와 운명을 같이해온 민요 사설은 인류 문화사의 소중한 정신 유산으로 평가받기에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노동 현장이 사라지고 소리꾼이 하나둘 유명을 달리하면서 제주민요, 특히 제주의 노동요는 빠르게 소멸의 길을 걷고 있다. 국가와 지자체에서 일부 민요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했으나 현장과 유리된 공연 위주의 전승 방식은 가락과 사설의 정형화, 박자와 장단의 기계화, 가창과 연행의 획일화를 가속화하면서 민요 자체가 지닌 질박함과 진정성, 시적 감수성을 거세해버려 본연의 생명력이 사라지고 본령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삶터와 일터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해 누구나 부르던 민초들의 노래가, 소리꾼에 의해 계보가 만들어지고 가창력 있는 전문 소리꾼의 전유물이 되어버리는 생뚱맞은 세태, 민속유산을 전승하고 보전하기 위해 탄생한 무형문화재 제도가 오히려 그 의미와 가치를 훼손하는 역설적인 상황은 현대사회의 고민거리다. 흙을 뒤집고 먼지를 털어도 본성을 찾을 수 없는 자가당착의 현실에서 민요 생태의 복원을 외치는 것은 무모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뭇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노래를 주고받는 소리 공동체가 복원된다면, 민요가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일상에서 자연스레 부르고 즐기는 대상이 된다면, 그리하여 수많은 음유시인이 현실에 실존한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위대함에 전율하지 않겠는가.

 

양영자 문학박사. ‘제주민요의 배경론적 연구’ ‘제주학으로서 제주민요’ 등을 집필했으며, 제주민요와 제주민속의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그림 Meg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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