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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6월호 Vol. 341

'한국 천년의 춤' 새 역사를 쓰다

SPECIAL┃멈추지 않는 '향연 신드롬'

 

 

2015년 초연 이래 국립극장에서 네 차례 공연하며 ‘한국춤 신드롬’을 일으킨 ‘향연’이 익숙한 둥지를 떠나 힘찬 날갯짓을 시작한다.


‘현대무용의 전설’ 피나 바우슈는 2000년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카네이션’ 내한 공연을 위해 서울에 왔다가 국립극장에 들러 국립무용단 공연을 관람했다. ‘한국 천년의 춤’이란 제목으로 다양한 전통춤의 하이라이트를 모은 것이었다.
힘과 우아함이 어우러진 한국 전통춤에서 동시대적 감성을 느낀 그녀는 이듬해 독일에 국립무용단을 초청했다. 국립무용단은 당시 독일 4개 도시 투어를 준비하면서 ‘한국 천년의 춤’ 구성을 바꾸는 등 세련되게 다듬는 한편 작품 제목을 ‘코리아 환타지’로 바꿨다. 피나 바우슈는 “‘코리아 환타지’에 대한 독일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보고 내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62년 창단 이래 국립무용단은 한국 전통춤을 모은 무대를 국내외에서 종종 선보였으며, 독일 공연을 계기로 이 공연은 ‘코리아 환타지’라는 제목으로 정착했다. 20여 편의 춤을 토대로 공연 시간에 따라 춤의 가짓수와 순서를 달리해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리고 2015년 국립무용단은 패션 디자이너 정구호와 손잡고 ‘코리아 환타지’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창작한 ‘향연’을 선보였다. 정구호가 누구인가. 그는 국립무용단에서 ‘단’(2013)과 ‘묵향’(2013)을 성공시킨 일등공신이다. 그는 두 작품의 연출과 무대·의상 디자인 등을 도맡아 한국 전통춤에 세련미와 모던함을 부여했다.


사실 정구호가 무용 작업에 뛰어든 지는 꽤 됐다. 그는 20년 전부터 자신의 친구인 안무가 안성수의 작품에 참여해 의상과 무대 디자인을 담당했다. 영화 ‘정사’ ‘텔 미 썸딩’ ‘황진이’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등에서 의상뿐만 아니라 비주얼 전반을 책임지는 아트 디렉터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연출까지 맡은 국립발레단 ‘포이즈’(2012)는 무용계에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당시 빨강·하양·검정 등 최소한의 색상을 사용하면서 조명 등을 통해 강렬한 이미지를 구현해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그의 역량이 제대로 발휘된 곳은 국립무용단이었다. 첫 작품 ‘단’은 그를 무용계의 ‘핫’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검은 상의와 각각 빨강·검정·하양·초록 주름치마로 이뤄진 심플한 의상, 대비가 명확한 조명 사용이 안성수가 안무한 춤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이어 사군자를 모티프로 한 ‘묵향’은 정구호와 전통의 궁합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보여준 작품이다. 고故 최현 선생의 ‘군자무’를 바탕으로 윤성주 당시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이 안무를 맡은 이 작품에서 그는 아름다운 네 폭의 수묵채색화 같은 미장센을 만들어냈다. 화선지의 흰색을 기본으로 매화의 진분홍, 난초의 초록, 국화의 진노랑, 대나무의 먹색을 포인트로 한 한복과 조명, 강인한 남성춤 또는 우아한 여성춤과 어우러진 무대는 관객을 시각적으로 사로잡았다. 정구호 특유의 미니멀한 무대 미학에 힘입은 국립무용단이 관객과 한층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묵향’은 이후 프랑스·홍콩·일본 등 해외에도 초청돼 호평을 받았으며, 지역 공연장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됐다.

 

 

각지로 뻗어나가는 ‘한국춤 신드롬’
‘단’ ‘묵향’에 이은 ‘향연’(2015)은 명실공히 정구호와 국립무용단의 협업이 만들어낸 최고의 성과다. ‘단’과 ‘묵향’에서 보여준 정구호의 무대 미학이 ‘향연’에서 최대치로 구현됐기 때문이다. 매우 성대하게 벌어지는 잔치라는 의미의 ‘향연’은 전통춤 명인 조흥동·김영숙·양성옥이 안무를 맡은 작품이다. 11편의 전통춤을 사계절에 해당하는 4막으로 구성했다.


1막 ‘봄’은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경건한 궁중무용으로, ‘전폐희문’ ‘가인전목단’ ‘정대업지무’를 새롭게 재구성했다. 2막 ‘여름’은 기원 의식을 바탕으로 한 종교무용인 ‘바라춤’ ‘살풀이춤’ ‘진쇠춤’으로 이뤄져 있고, 3막 ‘가을’은 ‘선비춤’ ‘장구춤’ ‘소고춤’ ‘오고무’ 등 신명 나는 민속무용이 펼쳐진다. 마지막으로 4막 ‘겨울’은 ‘신태평무’를 통해 태평성대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50여 명 무용수의 춤사위가 장관을 이룬다. 기존의 한국무용에서 여성 무용수의 춤이 중심을 이룬 것에 비해 ‘향연’은 남성과 여성의 춤을 동등하게 배치해 힘과 역동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춤사위의 원형을 고수한 채 현대에 맞도록 무용수 구성과 무대 요소들을 해체하고 재정리했다. 정구호는 ‘향연’ 초연을 앞두고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코리아 환타지’는 내게 한국무용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운명 같은 작품이다. 다만 좀 더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하면 전통춤이 대중에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연출가 정구호는 우리 전통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히는 오방색을 의상이나 도구 하나하나에 모두 넣는 것이 아니라, 작품 전체에 통일성 있게 녹여내 무대와 음악 등 전반적인 절제미를 추구했다. 군더더기를 걷어내 단순하지만 훨씬 강렬하고 화려해진 미장센은 신선한 충격을 줬다. 그는 국립무용단이 21세기에 걸맞은, 한국적인 모던한 아름다움을 갖추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덕분에 특히 20~30대 젊은 세대 관객들은 고루하고 촌스러운 것으로만 생각하던 전통춤을 세련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하게 됐다는 반응을 보였다.


‘향연’은 2015년 12월 초연부터 전회 매진으로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2016년 4월 재공연에선 개막 전부터 매진을 기록하며 공연 횟수를 추가했다.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도입 이후 국립무용단이 공연 개막 전 매진으로 공연 횟수를 추가한 사례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2017년 2월과 12월 재공연 모두 맹렬한 기세로 매진되는 등 국립무용단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후 정구호는 국립무용단과 한국 고전 ‘춘향전’을 새롭게 재해석한 무용극 ‘춘상’(2017)을 선보이기도 했으나 전작에 비해 그의 장점을 극대화하지는 못했다는 평가다. 사실 일부 평단에서는 국립무용단과 정구호의 작업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는 목소리도 여전히 존재한다. 관객 유치를 위해 예술성보다는 대중성과 유명세를 좇는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공연을 관람하고 즐길 관객이 없다면 안무가도, 무용수도 존재 의미가 없다. 게다가 유난히 장르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한국과 달리 해외 무용계에서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를 끌어들이거나 협업하며 무용에 대한 관객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물론이고, 장르의 외연도 넓히고 있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무용계의 발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오페라계에서도 과거엔 성악이나 기악 전공자가 연출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요즘은 생동감 넘치는 프로덕션을 만들기 위해 영화감독·무대 디자이너·연극 연출가 등에게 맡기는 경우가 흔해졌다. 특히 건축이나 디자인을 전공한 연출가는 음악을 제외한 무대·의상·조명까지 도맡아 하나의 콘셉트로 통일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국립무용단 ‘향연’은 그간의 흥행을 바탕으로 넓은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각지의 공간에서 더 많은 이들과 만나기 위해 국립극장이라는 둥지를 떠나 날갯짓을 시작한다. ‘향연’에 대한 소문을 듣고 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하던 이들에게 희소식이 될 것이다. 우선 6월에는 서울 예술의전당과 지방 공연이 준비돼 있다. 6~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시작으로, 15~16일 대전예술의전당, 23일 울산문화예술회관, 그리고 28일 거제문화예술회관을 도는 일정이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이 올해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면서 ‘향연’ 역시 외부 공연장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국립무용단뿐만 아니라 국립극장의 다른 전속단체인 국립창극단·국립국악관현악단 역시 올 초부터 예술의전당·명동예술극장 등 각지의 무대에 서고 있다.


사실 국내 공연계에서는 갈 길이 멀지만 해외 사례를 보자면 공연장 간의 협업은 매우 빈번한 일이다. 여러 공연장이 공동 제작에 나서는 것은 물론이고, 기획공연의 일부를 공유하기도 한다. 서로에게 유리한 전략이 되기 때문이다.
실례로 이탈리아 베니스의 대표 오페라하우스인 라 페니체 극장이 1996년 화재로 공사에 들어갔을 때 베니스에 있던 또 다른 오페라하우스인 말리브란 극장은 라 페니체 극장의 전속 예술단체에 문호를 개방했다. 새로운 극장이 건립될 때까지 이들 단체와 함께 작업한 것은 여러모로 열악했던 말리브란 극장이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두 극장은 지금도 다양한 협업을 통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있다.


이처럼 리모델링 기간에 국립극장 전속단체가 다른 공연장을 단순히 대관하는 것을 넘어서 공동 기획과 공동 제작에 나서면 어떨까 싶다. 특히 기획 및 제작 노하우가 부족한 지역 공연장 또는 예술단체와 협력하는 것도 권하고 싶다. 앞으로 국립무용단 ‘향연’이 보여줄 행보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장지영 ‘국민일보’ 기자 겸 공연 칼럼니스트. 연극·뮤지컬·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좋아하는 한편 극장과 축제 등 공연 생태계의 선순환을 위한 예술 정책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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