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복원과 미래를 위해 소극적이지만 강한 족적을 남긴 이강덕.
전통에서 길어 올린 송춘(頌春)의 음악을 남기다.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신춘新春 음악회에 ‘송춘곡’은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다. 이강덕(1928~2007)이 1965년에 작곡한 이 작품은 새봄을 지칭하는 송춘頌春이라는 말처럼 ‘봄날의 기쁨’을 그리고 있다. 소금의 높은 소리는 봄날에 지저귀는 새소리를, 피리 소리는 시골 소년이 불어젖히는 호드기 소리를 연상시킨다. 가야금의 아르페지오는 얼음이 녹아 계곡에 흘러내리는 시냇물이다. 여기에 아쟁이 봄날 황소의 울음을 그린다.
한반도 산천의 아름다움을 국악기를 통해 묘사했던 이강덕은 본 시리즈의 2월과 3월에 각각 소개된 김기수·김희조와 함께 창작국악 1세대에 속한다. 김기수(1917~1986)가 1950년대 초부터 대편성의 ‘관현악’을 통해 창작국악의 초석을 다졌고, 김희조(1920~2003)가 국악과 양악을 아우르는 ‘한양합주(韓洋合奏)’를 통해 창작국악의 외연을 넓혔다면, 이강덕은 창작국악에 ‘협주곡’을 개척하고 초석을 다진 인물로 기억된다. 윤중강은 “20세기에 가야금독주곡을 개척한 인물이 황병기라면, 가야금협주곡을 개척한 인물이 이강덕”이라고 말한다.
전통음악으로 신(新)국악을 짓다
1928년에 태어난 이강덕은 1941년에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에 입학했다. 이왕직이란 1910년에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합병하고 이왕가의 업무를 맡기 위해 계승한 부서로, 이왕직(李王職)의 ‘이(李)’는 조선왕실의 이씨 가문을 지칭한다. 이왕직아악부는 이왕직의 의례에 사용되는 음악 연주를 전담했고, 악사들은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를 통해 배출되었다.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에 6기생으로 입학한 이강덕은 피리를 공부했다. 1944년에 졸업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양성소가 배출한 마지막 궁중 악사가 되어 이왕직아악부에 들어갔다.
일제강점기의 이왕직아악부는 광복 후 구왕궁아악부가 되었다. 대표직을 수행하던 이주환은 1948년 아악원 국영(國營)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했고, 이것이 만장일치로 통과되면서 1950년 1월에 구왕궁아악부는 국립국악원이 되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개원이 늦어지던 중 국립국악원은 결국 피난지인 부산에서 1951년에 개원을 맞이했다. 이왕직아악부에서 구왕궁아악부로, 그리고 국립국악원으로 이강덕의 삶도 함께 흘러갔다.
그러던 중 그는 1962년 ‘새하늘’을 작곡해 신국악작곡공모에 당선되었다. 1964년 종묘제례악이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될 때, 보유자로 인정받아 편경 연주를 맡기도 했다. 1960년대는 정부가 국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던 때였다. 신국악작곡공모도 정부의 지원을 받던 국립국악원이 5.16혁명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실행한 사업 중 하나였다. 그런 점에서 “정권의 이데올로기인 반공과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것”으로서 국악을 활용했다는 전지영의 비판적 시점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국악관현악에 협주곡 양식 도입
그의 신국악작곡공모 입선은 서울시국악관현악단으로 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65년에 창단한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은 새로운 창작국악 작품 수요에 늘 허덕이고 있었다. 1968년에 가야금 연주자로 입단한 그는 악장으로 활동했으며, 1988년 정년퇴임 때까지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1965년 3월 2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창단 기념 공연을 한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프로그램을 보면 ‘관현악단’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통일되지 않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제14회 정기연주회(1968년 9월 20일)는 홍원기가 작곡한 ‘청추의 야상곡’이 1부의 막을 열고, 피리 독주 ‘상령산’ ‘부채춤’ ‘평시조’ 가야금병창 ‘새타령’이 이어진다. 2부의 막은 이강덕의 ‘죽의 환상’이 열고, 이어서 아쟁산조·경기민요·남도민요가 나오다가 김희조의 관현악 ‘놀량’으로 막을 내린다. 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였음에도 이처럼 전통음악과 창작국악 그리고 무용이 혼재된 공연은 197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여정 속에서 이강덕의 창작곡은 창작국악을 일삼아야 했던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추진력이자 중요한 연료였다. 오늘날에도 무대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송춘곡’을 비롯해 ‘염불주제에 의한 환상곡’(1969) ‘가야금 협주곡 1번’(1970) ‘메나리조 주제에 의한 피리협주곡’(1970) 등은 당시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이 나아가야 할 이정표 구실을 했다. 특히 ‘가야금 협주곡 1번’이 발표되면서 ‘협주곡’이라는 형식명이 창작국악사에 안착하기 시작했다.
김기수의 고전주의, 이강덕의 낭만주의
창작국악 1세대는 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하지 않은 세대다. 김기수·김희조·이강덕 모두 이러한 공통점이 있다. 그러면서도 각자의 개성이 있다.
소재나 형식에서 이강덕은 김기수와 곧잘 비교되곤 한다. 김기수가 주로 민족이나 국가의 이념을 음악적으로 표상했다면, 이강덕의 주제는 한결 개인적이고 서정적이다. 예를 들어 순국선열의 충혼(‘정백혼’)·3.8선을 넘어서는 민족 통일(‘파붕선’), 8.15광복(‘송광복’)·5.16혁명(‘5월의 노래’) 등이 김기수의 주요 소재였다면, 이강덕은 대표작 ‘송춘곡’과 같이 봄을 노래하는 등 서정적이고 환상곡풍의 작품을 선호했다.
이소영은 김기수의 음악 어법이 아악과 정악에 치중했다면, 이강덕은 민속음악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또 김기수가 합주를 통해 대형화되는 방식을 추구했다면, 이강덕은 독주와 합주의 대비를 통해 독주 악기의 섬세하고 변화무쌍한 음색과 전개를 보여주길 선호한다. 이러한 이강덕의 협주곡 형식을 ‘전통 시나위 합주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한다. 시나위 역시 즉흥 연주와 악기들의 합이 일궈나가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 자유로움은 시나위와 많이 닮아 있다. 김기수가 장구 파트를 일일이 기보했다면, 이강덕은 ‘가야금 협주곡’ 1번에서 휘모리장단이나 세마치장단 등의 장단 이름만 적고 세밀한 장단 진행은 연주자에게 일임한다.
협주곡 개척과 함께 그가 즐겨 사용한 형식 중 또 하나는 ‘환상곡’이다. ‘죽의 환상’(1968) ‘염불 주제에 위한 환상곡’(1969) ‘산조 환상곡 1번’(1972)과 2번(1973) ‘환상합주곡’(1978) 등이 그렇다. 환상·환상곡은 서양음악에서 보면 형식을 중요시한 고전주의와 달리 주관적 감성을 중요시한 낭만주의의 산물이었다. 이강덕이 이러한 서양음악의 성격을 염두에 두고 곡목과 환상곡 형식을 애용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관현악과 합주 형식을 중요시한 김기수가 고전주의에 속한다면, 개인적인 서사와 자유로운 환상을 중요시한 이강덕은 낭만주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전통에서 길어 올린 ‘전통-스타일’
창작국악 1세대의 작품은 전통음악을 분해하기보다는 약간의 변형이나 원형 그대로를 사용해 작곡한 것이 많다. 따라서 새로움에 대한 목적의식이 지금에 비하면 덜한 편이며,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방식보다는 유有의 존재를 또 다른 유有로 전환시키는 방식에 더 가깝다.
작곡가 이성천(1936~2003)은 ‘한국전통음악 형성론’(2004)에서 이러한 방식에 대해 ‘작곡’이나 ‘창조’라는 말보다는 ‘형성(formation)’에 더 가깝다고 말했다. 작곡이 새로운 것의 창조를 의미한다면, ‘형성’은 기존 선율을 중심으로 한 변주 선율을 가지고 새로운 악곡을 만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강덕의 ‘환상합주곡’도 빠른 속도의 1악장과 보통 속도의 2악장에서 민요나 산조의 반음계적 요소가 선율에 응용된다. 3악장의 주요 재료는 굿거리장단이다. ‘해금 협주곡 1번’(1972)은 ‘한범수류 해금산조’를, ‘가야금 협주곡 7번’(1980)은 ‘성금련류 가야금 산조’를 협주곡으로 새로이 ‘형성’한 경우다.
오늘날 이러한 1세대의 작업 방식은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창작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로 인해 전통의 흐름이 단절되었고, 시대와 정권에 의해 새로운 국악(新國樂) 생산을 독촉받던 이강덕의 시대에 이러한 작업 방식은 빠른 시간 안에 전통의 복원과 미래를 위한 중요한 창작 방식 중 하나였을 것이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2016년 11월 25일에 올린 ‘2016 마스터피스’ 공연에서 이강덕의 창작 정신과 작품을 되새겨보는 작품을 위촉·초연한 바 있다. 이때 김성경은 이강덕이 발표한 ‘죽의 환상’과 ‘환상협주곡’의 주제를 빌려 ‘환상합주곡’에 의한 대금 협주곡 ‘죽竹의 환상幻想-2016’을 선보였다. 이강덕은 협주곡에 처음으로 카덴차를 도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에 김성경은 “카덴차의 도입부에 스승의 작품을 연주하며 마음속에 남겨둔 스승의 선율을 담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강덕은 서울시국악관현악단에 재직하면서 대한민국 작곡상(1981)과 KBS국악대상 작곡상(1984)을 수상했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 퇴직 후 1988년부터 청주시립국악관 현악단에서 지휘를 맡았고, 1991년부터 충주시립국악관 현악단 지휘자로 활동했다. 올해의 봄에도 그의 ‘송춘곡’은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글 송현민 음악평론가. 음악을 듣고 글을 쓰며 부지런히 객석과 책상을 오가고 있다. 급변하는 음악 생태계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 미래를 ‘기획’라는 자료가 된다는 믿음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 제공 국립국악원, 정범태 사진작가 | 그림 권준 일러스트레이터
참고문헌
이소영 ‘한국음악의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이성천 ‘한국전통음악 형성론’
윤중강 ‘창작에 희망을 걸다’
전지영 ‘근대성의 침략가 20세기 한국의 음악’
음반 ‘이강덕 작품집’
KBS FM에서 ‘21세기를 위한 한국의 전통음악 시리즈’의 일환으로 나온 음반이다. 작곡가 생전인 1997년에 나온 음반으로 ‘송춘곡’과 함께 이강덕의 3대 협주곡이라 할 수 있는 ‘염불 주제에 의한 환상곡’ ‘메나리조 주제에 의한 피리협주곡’ ‘가야금 협주곡 1번’이 수록되어 있어서 협주곡의 기초를 다진 그의 면모를 음악으로 접할 수 있다. 양주섭 지휘로 KBS국악관현악단이 연주하며 이종대(피리)와 민의식(가야금)이 협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