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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4월호 Vol.339

'소녀가' 아니 어쩌면 '성년가'

리뷰┃국립창극단 신창극시리즈 '소녀가'

2018년 2월 28일~3월 4일 |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신창극시리즈 첫 번째 작품 ‘소녀가’가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동화 ‘빨간 망토’는 오늘날의 소녀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다.
“옛날 옛적에…” 동화 속 이야기는 늘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전해지고 또 전해져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이야기로 그 형태를 달리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빨간 망토’ 이야기 역시 그러하다. “옛날 옛적에 한 소녀가 있었다”라는 첫 문장으로 비슷하게 시작하지만, 어떤 소녀는 나쁜 늑대에게 잡아먹히고, 어떤 소녀는 사냥꾼에 의해 구출되고, 어떤 소녀는 할머니와 힘을 합쳐 그 늑대를 물리친다. 또 어떤 소녀의 이야기는 지금쯤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늑대를 물리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이야기는 전해지고 전해져 시대적인 요구나 변화하는 문화적 토양 속에서 새롭게 재해석되어왔다. 그것은 순진무구한 소녀에게 사회가 던지는 경고였고, 사냥꾼에 의해서 구출되어야만 하는 힘없는 여성의 사회적 입지를 반영하는 모습이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여성의 주체성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의 변화를 거쳐왔다. 17세기부터 21세기로 ‘빨간 망토’의 이야기가 이어져오는 동안, 이 동화는 문학뿐만 아니라 연극과 오페라, 심지어 컴퓨터 게임의 소재로도 활용되며 장르 간의 경계를 다양하게 넘나들었다. 심지어 그 유명세로 인해 독일에서는 샴페인·초콜릿·치즈 등의 상품명으로 쓰이면서 하나의 브랜드 가치마저 부여받았다.


‘빨간 망토’가 이렇게 오랜 시간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온 이유는 이것이 구전되면서 축적된 서사의 힘에 있다. 서사의 내용이 되는 이야기는 그 시대의 사람들을 매혹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도구였다. 국립창극단 신창극시리즈 그 첫 시작을 알린 ‘소녀가’의 무대 역시 멋지게 드리워진 푸른 겹겹의 커튼 속에 강렬한 서사의 힘을 품은 새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준다. 프랑스 작가 장 자크 프디다(Jean-Jacques Fdida)가 ‘빨간 망토 혹은 양철 캔을 쓴 소녀’(2010)를 재해석하면서 기존의 이야기에서 배제되었던 소녀의 억압된 욕망을 끄집어냈다면, 이를 바탕으로 한 ‘소녀가’는 이자람이라는 젊은 아티스트의 새로운 시선은 관객의 기대감을 충족시킨다. ‘소녀가’는 ‘평범한 소녀’가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좇는 이야기다. 아티스트 이자람이 극본·연출·작창·작곡·음악감독 역할까지, 1인 5역을 맡으며 우리 시대의 ‘소녀’에 대한 그의 생각이 매우 명쾌하고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무엇보다 역할을 분리해 부르는 분창 형태의 기존 창극 형식으로부터 다시 일인 창자를 부각해 판소리의 서사성과 특장을 살린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유쾌하게 풀어낸다. 공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악사 세 명이 무대로 나와 무언극을 펼친다. 이들의 몸짓은 뭔가 재미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으로 객석을 사로잡는다. 무대의 커튼을 연장한 것 같은 이 ‘소년’들의 의상은 원피스 형태로 젠더(gender)의 경계를 귀엽게 비껴가기 때문이다. 악사들, 이준형(고수·타악)·고경천(신시사이저)·김정민(베이스)은 기존의 창극에서 들을 수 없었던 다른 소리를 들려주면서 소리꾼이자 배우 이소연이 당돌하고도 발칙한 이 이야기를 함께 이끌어가는 또 다른 화자가 된다.

 

‘소녀가’의 드라마투르기는 욕망과 힘없는 주체로 보이던 소녀가 자신을 해치려는 늑대를 도리어 골탕 먹이며 유유히 집으로 돌아간다는 반전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 이야기에 대한 뒤집기를 시도한다. 따라서 소녀의 욕망은 ‘소녀가’에서 가장 재미난 극적 순간을 만들어낸다. 욕망이라는 측면은 협소하게는 크루아상·키슈·닭고기 카슐레·마들렌·크렘 브륄레 등 자세하게 열거되는 음식들의 통통 튀는 이름에서 식욕의 심상을 그리며, 더 궁극적으로 미지의 숲을 탐험하고 싶은 소녀의 호기심으로 발동된다. 열 살이 되면 으레 입는 철 옷과 철 신발을 소녀는 서둘러 “뿌셔뿌셔”버리고 벗어던진다. 어린 소녀에게 허용되지 않는 욕망은 철과 같이 단단하게 잠기고 차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소녀의 적극적인 행위가 유쾌한 방식으로 금기에 도전하며 희극성을 발휘한다. 철 옷과 철 신발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순간, 무대 위에서 빨간 망토가 내려온다. 속이 다 비치는 야릇한 소재에 그 둘레가 붉은 털로 장식된 망토는, 귀여운 소녀의 것이 아니라 야한 나이트가운에 가깝다. 이 발칙한 빨간 망토를 두른 소녀는 이제 본격적으로 금지된 욕망의 여행길에 오른다.


현대 창극에 대한 새로운 모색으로 이 작품이 모노드라마(1인극)의 형식을 시도한다면, 커튼이 드리워진 무대와 푸른색과 붉은색이 교차하는 조명, 그리고 매혹적인 붉은 옷을 입고 거침없이 노래와 춤을 펼치며 예리한 위트와 풍자로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유혹하는 이소연의 무대는 마치 ‘카바레’ 공연장의 여가수를 떠올리게 한다. 억압된 욕망을 거침없이 이야기하기에 카바레 무대만큼 적합한 공연 형식도 없을 것이다. ‘소녀가’는 한 평범한 소녀의 욕망에 가해지는 속박을 벗어나 자유를 찾고, 장르적 속박에서 벗어나 노래·춤·음악·역할 놀이가 자연스레 한자리에 어우러져 재미난 무대 미학을 일궈낸다. 그 속에서 흔들림 없이 자신의 호흡을 유지하며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이소연의 매력도 빛을 발하지만, ‘소녀가’는 젊은 세대에게 다소 생소한 창극이라는 예술 장르를 친근하고 쉽게 와닿게 만든다. 박제된 예술로서의 창극이 아닌, 이 시대와 소통하고 재미까지 주는 창극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보편성과 대중성을 확보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선함에도 불구하고, 극적 전개에 다소 의문이 남는 부분도 있다. 먼저, 극 중 할머니는 소녀를 숲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채 이야기 속에서 완결되지 못하고 사라진다는 점. 늑대를 골려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소녀의 행위가 그저 당돌하게 다가올 뿐. 소녀가 가진 본연의 욕망이 실현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나아가 늑대의 악덕이 상징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원론적으로 소녀가 자신의 욕망을 인지하고 깨닫게 되는 계기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 궁금증으로 남는다. 단순히 “난 뭐든지 궁금해. 궁금한 건 뭐든지 재미있어, 재미있는 건 뭐든지 좋아”라는 말로 “소녀가 다 알고 있었다”라고 설득하기에는 극적 전개의 미약함이 드러난다. 세상을 향한 단순한 ‘호기심’과 자신의 욕망을 인지하고 성취하려는 ‘시도’는 결코 다르기 때문이다. 소녀가 철 옷과 신발이 자신을 속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선행된다면, 이 이야기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연출가의 시선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무대에 발을 딛는 첫 순간부터 소녀의 모습은 이미 성숙하고 농염한 아가씨의 모습에 가깝다. ‘소녀’ 하면 통상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와는 다른, 한 성인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노래하는 것 같은 이 공연은 그래서 ‘빨간 망토’에 대한 뒤바뀐 시선을 너무 일찍부터 노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이러한 점에서, 이 공연은 ‘소녀가’ 아니 어쩌면 소녀의 지난한 성장기를 한 번에 뛰어넘어버린 ‘성년가’가 아닐까.


이러한 의문과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소녀가’가 신창작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서 성공적인 첫발을 내디뎠다는 것은 분명하다. 매회 매진 사례를 기록한 관객의 열렬한 반응 속에서, 이는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그동안 국립창극단은 창극의 대중화와 현대화를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여왔다. 지금까지 주로 국내외 중진 연출가들과의 작업을 중심으로 풍성하고 다채로운 국립창극단만의 레퍼토리가 구축되었다면, 신창극시리즈를 기점으로 이제 젊은 후속 예술가들의 투입은 창극의 스펙트럼을 더 확장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신창극시리즈의 두 번째 주자는 연출가 김태형이다. 실험적이고 독특한 무대 연출로 이슈몰이를 하고 있는 김태형 연출과 창극이 만났을 때 과연 무대 위에 어떠한 에너지가 폭발할지 궁금해진다.


덧붙이는 생각이지만, 옛날 옛적에 그보다 더 옛날 옛적은 어쩌면 늑대가 소녀에게 한 짓이 나쁜 짓인지조차 아무도 모르는 시대였던 게 아닐까. 옛날 옛적이 아닌 지금 여기, 늑대에게 나쁜 일을 당한 소녀들이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시대가 당도했다. 자신을 해치려는 늑대를 도리어 골탕 먹이며 유유히 집으로 돌아가는 소녀의 모습에서 어쩌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작은 희망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단비 영어와 독일어로 된 희곡을 번역하고, 연극과 뮤지컬에서 드라마투르기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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