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를 그대로 무대로 옮겨왔다. 가무악극의 대가 손진책 연출가가 창극의 본질인 판소리의 특장과 멋을 살려 정면 승부를 건다.
심청을 모르는 이, 있을까? 줄거리 복기는 사족에 지나지 않으니 심청에 대한 내용 설명은 삼가도록 하겠다. 한국인이라면 모를 이 없는 심청이 온다. 달포 전, 마당놀이 ‘심청이 온다’로 관객을 쥐락펴락했던 연출가 손진책이 이번에는 창극 ‘심청가’를 가지고 온다.
“김성녀가 예술감독으로 있을 땐 연출 안 하겠다 했는데….”
공연계에 관심이 없어도 손진책과 김성녀가 부부지간이라는 사실쯤 누구나 알 것이다. 그는 아내가 2012년 3월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국립창극단과 한 번도 작업하지 않았다. 스스로 그렇게 다짐한 것이다. 그는 그 다짐을, 약속을 6년간 지켜왔다. 이번에 마음의 결기를 풀게 된 배경에는 김성녀 예술감독의 퇴임이 있었(을 것이)다. 김성녀 예술감독은 지난 3월 예술감독직에서 물러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그의 이번 ‘심청가’ 연출은 퇴임하는 아내를 위한 남편의 기념 선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김성녀의 예술감독직 연장 결정은 본 인터뷰 이후에 발표되었다.)
“그사이(다짐을 지키는 사이) 판소리 다섯바탕 중에서 심청가만 남았어요. 그래서 심청가를 하게 됐어요.”(웃음)
국립창극단에서는 독일 출신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의 ‘수궁가’(2011·2012)를 시작으로, 루마니아 출신의 연출가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2014), 오페라 연출가 이소영의 ‘적벽가’(2015), 연극 연출가 고선웅의 ‘흥보씨’(2017)까지 판소리 다섯바탕 중 네 바탕을 무대에 올렸다. 이번 ‘심청가’가 오르고 나면 김성녀 예술감독 임기 내 다섯바탕을 다 무대화하는 셈이다. 취임 초 밝혔던 ‘창극 현대화 작업’의 포부는 결코 무리한 욕심이 아니었다. 한편 국립창극단은 2012년 레퍼토리시즌제 이후 ‘장화홍련’ ‘메디아’ ‘내 이름은 오동구’ ‘서편제’ ‘숙영낭자전’ ‘코카서스의 백묵원’ ‘오르페오전’ ‘트로이의 여인들’ ‘산불’ 등 타 장르의 국내외 작품을 창극화하거나, 외국 연출가를 초청하는 등 창극의 외연 확장에 앞장서왔다. 그렇다면 손진책 연출가는 이번에 어떤 카드로 창극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줄까?
“나는 사실 창극 보는 것보다 판소리 연창 듣는 게 더 재미있거든요. 그런데 관객 중에는 나 같은 사람도 있을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동안 국립창극단이 현대적 공연을 많이 올리면서 소리를 좋아하던 관객이 줄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그런 관객이라면 이번 ‘심청가’ 공연에 오셔서 소리의 맛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손진책 연출자가 선택한 방향은 기존에 국립창극단에서 제작했던 창극들과는 정반대다. 기존의 전작들이 창극의 외연 확장에 집중했다면, 이번 ‘심청가’는 창극의 본질인 판소리에 집중해 내적 충실을 기하겠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겠다. 비유하자면, 전작들이 덧셈의 미학이라면, ‘심청가’는 뺄셈의 미학이랄까.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은 버리고, 본질적인 고유의 것들만 남기겠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여기서 그가 힘주어 강조하는 본질은 바로 ‘소리’로, 판소리 고유의 맛과 멋을 최대한 살리는 게 이번 작품을 준비하는 그의 자세다. 이쯤에서 평소 판소리와 창극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춰보아도 좋겠다.
“사과나무에 배를 접하는 것과, 배나무에 사과를 접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죠? 우리 것에 서구의 극 형식을 더하는 것과 서구의 극 형식에 우리 것을 더하는 것도 아주 다르죠. 그런데 오랫동안 만들어온 창극은 서구의 리얼리즘 무대, 액자 무대에 판소리를 넣은 거였어요. 조선조 말에 판소리가 분창 형태로 무대화된 이후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금의 창극 형식이 만들어졌지만,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정립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서구의 연극 양식을 그대로 대입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거죠. 난 그건 재미없다고 생각해요.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격이랄까.”
덧붙여 그는 중국에 경극, 일본에 가부키가 있듯, 우리에게 고유한 공연 양식이 있다면, 그것은 판소리일 것이라 말했다. 창극을 우리의 고유한 양식으로 보기에는 아직 덜 이식된 측면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창극을 연출할 때면 서구적 양식이 아닌 우리 고유의 양식을 찾아 그 안에 판소리를 이식하려 했다. 이는 창극을 연출하건 연극을 연출하건, 그가 항상 견지해온 자세일 것이다.
1974년 마당극 ‘서울말뚝이’로 데뷔한 이래로 그는 쭉 한국적 고유 양식의 연희 개발, 혹은 발견을 위해 애써왔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당놀이다. 혹자는 마당놀이가 한국의 전통 설화나 판소리, 고전소설에서 소재를 취하고 있고, 또 우리의 전통음악을 활용하고 있어 마당놀이를 우리 민족의 유구한 전통연희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는 대단한 오해다. 우리에게 익숙한 마당놀이는 1981년 손진책이 개척한 장르다. 그런 그가 생각하는 마당놀이와 창극의 차이는 무엇일까.
“마당놀이와 판소리의 큰 차이는, 마당놀이는 열려 있는 연극이라 풍자와 해학이 더해진 공연이라는 것이고, 판소리는 소리꾼 1인이 기량을 갈고닦아 풀어내는 것이니 훨씬 더 정제된 공연이죠. 건강한 생명력으로 보면 마당놀이가 우선하지만, 정제된 면에서는 판소리나 창극이 앞서 있는 겁니다.”
내친김에 최근 연출한 ‘심청이 온다’와 창극 ‘심청가’의 차이도 물었다. 가장 큰 차이는 음악이다. “창극하고 마당놀이는 전혀 다르지. 창극은 판소리만 가지고 하는 거지만, 마당놀이에는 판소리?민요 거기에 직접 작곡한 곡도 들어가죠.” 비단 음악만 다른 게 아니다. 대중연희의 성격이 강한 마당놀이 ‘심청이 온다’에는 포졸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한다거나 심청이 와이어를 타고 내려오는 등 눈요깃거리가 풍성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도 현시대에 맞게 각색되었다. ‘심청이 온다’의 심청은 사리 판단도 밝고,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기에 주저함이 없는 당찬 21세기 여성으로 등장한다. 또한 심학규는 능구렁이 같은 면도 겸비한 허세 가득한 ‘허당’으로 등장한다. 당대의 사건을 해학적으로 가져와 현실을 풍자하는 것도 마당놀이 ‘심청이 온다’의 매력 중 하나다. 그러나 창극 ‘심청가’에서 이러한 재해석은 기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는 심청가의 맛을 느낄 수 있게 원전을 그대로 구현할 예정이다.
물론 아주 똑같을 수는 없을 터. 완창을 위해 네댓 시간이 필요한 이 작품을 그는 두 시간 내외로 압축 중이다. 이번 공연의 관건은 원전을 어떻게 압축하느냐에 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떤 기준으로 소리를 솎아냈을까.
“판소리에서는 아주 좋은 소리인데, 창극으로 만들 땐 필요 없는 소리가 많죠. 단적으로 장면을 서술하는 건 필요 없잖아요. 하지만 난 그런 소리라도 좋은 소리라면 살리려고 해요. 반대로 좋은 소리를 살리는 과정에서 전개상 불필요한 이야기는 생략하려고 해요. 심청가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요.”
좋은 소리란 무엇인지 부연 설명을 부탁하자, 그건 귀명창이나 알아들을 수 있지, 쉽게 말해 서양음악의 이론에 맞춰서 ‘몇 분의 몇 박이 좋은 소리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고. 사설과 관련해 또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다. 현대인은 여간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고어와 사어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사람들이 오페라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을 들을 때, 이탈리아어를 알거나 전공한 사람들이나 의미를 알지, 사람들이 다 뜻을 알고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요. 단어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겠지만, 그 의미를 모르더라도 그냥 선율 자체로 만족하는 거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요즘 사람들이 한문이나 사자성어를 모른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다고 봐요. 그걸 풀어서 노래하면 이해는 되겠지만 오히려 소리의 맛은 안 날 겁니다.”
앞서 창극 ‘심청가’에서 재해석은 기대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위 질문에 덧붙인 그의 대답에서 새로운 해석을 기대해도 좋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이번 창극 ‘심청가’가 고답적인 ‘효’의 의미를 강조하는 작품에 머물지는 않을 것 같은 예감. 고어와 사어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가던 중, 그는 판소리를 집대성할 당시 신재효가 양반들의 입맛에 맞게 작품을 편집한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윗사람들을 위해서 민중의 힘이 제거된 판본과 건전한 민중의 생명력이 살아 있는 민중 판본이 있다는 말이었다. ‘심청가’도 표면적으로는 효를 강조한 듯하지만, 이면적으로는 골계미를 강조한 작품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당시 조선 민중이 굉장히 어렵게 살았잖아요. 권력자들에게 시달려야 했고. 그래서 민중은 심청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도 환생하고 재생하는 걸 믿고 싶었던 거죠. 가난한 봉사의 딸이 황후가 되는 게 민중 염원의 표현이었던 거지. 심학규가 왕의 장인이 되는 것도 서민들의 보상심리를 반영한 것이었거든요. 한편으로는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장면을 두고도 심청의 희생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이것이 진정한 효인가’ 역설적으로 항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죠.”
시대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이기도, 민중을 대변하는 하나의 외침이기도 했던 심청. 고전에 투영된 우리의 진솔한 이야기가 ‘창’극 ‘심청가’로 다시 무대에 오른다.
글 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 공연문화월간지 ‘씬플레이빌’과 서울무용센터 웹진 ‘춤:in’의 편집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