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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호 Vol.369

돌기의 질서

내일의 전통 | 도예가 윤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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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의 순간에 툭 놔버리는 호방함 대신 끝까지 디테일을 챙기는 집요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모든 선입견은 색색의 돌기가 화려하게 돋아난 도자를 본 후 깨끗이 날아갔다  

나와 비슷한 눈과 생각으로 그의 작품을 보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윤주철 작가의 말대로 호好, 불호不好가 명확하게 갈리는 작품이다. 하지만 실물을 본다면 호 쪽으로 훌쩍 기우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처음 그의 이름을 접한 때는 잡지사에서 에디터로 일할 때였다.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의 소장 소식은 예술계에서 비중 있게 소개하는데, 이 박물관이 세계 최초?최고 디자인 박물관으로 그 권위가 우뚝하기 때문이다. 컬렉션도 그만큼 방대한데 박물관에서 중시하는 것은 동시대성과 ‘내일’ 이다. 과거를 답습하는 작품에는 관심이 없고 새로운 미래를 보여주는 작품, 그중에서도 실험적 기법과 형태, 독창적 미감을 드러내는 작품만 소장품 목록에 올린다. 그런 곳에서 컬렉션을 결정했다니 호의를 품은 채 들여다보게 됐다. 기사도 작성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내 취향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우연히 성수동에 있는 갤러리 소소단상에서 그의 작품을 다시 봤다. 장식적이되 아름다웠다. 형태도 그저 둥근 것이 아니고 몸통에는 색색의 돌기가 화려하게 돋아나 있었다. 그 수많은 돌기는 하나하나 주황색을 띠고 있었는데 몸통 전체를 휘감고 있다 보니 수초가 물길에 너울대듯 잔잔한 리듬과 역동성이 느껴졌다. 가만 들여다보게 하는 힘도 있었다. 정교하고 치밀한 질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빼곡하게 올라온 돌기는 하나의 생태계처럼 둥근 표면을 가득 메웠고 각각의 수많은 돌기에는 일일이 ‘수금水金’을 찍듯 올렸다. 이 작업을 할 때 그는 돋보기를 사용한다. 그래야 바늘처럼 뾰족한 돌기 끝에 정확히 붓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눈앞에서 들여다보고 있자니 박서보의 회화가 떠올랐다. 수행하듯 반복하는 몸의 노동에서 탄생한 작품이지만 묘하게 세련되고 화려한. 윤주철 작가의 작품 역시 몸의 노동과 수려한 미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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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돌기에서 찾은 미래
그 역사가 긴 만큼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와 형태의 도자가 있다. 윤주철 작가의 그것은 그중에서도 입지가 명확하다. 뾰족할 첨尖, 꾸밀 장裝 자를 써서 만든 이름, 첨장기법尖裝技法은 그가 고안하고 만들고 발전시킨 그만의 것이다. 첨장은 거칠게 풀이하자면 ‘뾰족하게 꾸민다’라는 의미다. 
둥글고 완만한 한국 전통 도자기의 미감과 정반대 지점에 있는 듯한 기법은 분청사기의 귀얄기법에서 왔다. 분청사기를 장식하는 기법 중 하나로 풀비 같은 넓고 굵은 붓으로 기면 위에 백토를 바르는 기법. “1999년에 석사 과정을 마치고 2000년대 초반 해외 작가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한국 현대 도자의 특징은 무엇이냐, 너의 미감과 방향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결국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었죠. 그전까지는 흙으로 조각을 만드는 도조만 해왔기 때문에 전통과 현대를 연결해 설명하는 논리나 명분을 못 찾겠더라고요. 그렇게 돌연 길을 잃어버리니 오랫동안 작업을 못 했어요. 그때부터 청자·백자·분청을 포함해서 도자 역사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분청은 청자가 쇠퇴하고 백자가 자리 잡기 전 격변기에 등장한 자기인데 민요民窯에서 주도했기 때문에 계룡산에서 나는 것과 남해에서 나는 것이 달라요. 각각의 지역성이 뚜렷하게 살아 있죠. 서민적이고 자유분방하며 현대적인 면도 있어요. 기법도 다양하게 출현했는데 그중 귀얄기법에 끌렸어요. 그때부터 여러 재료를 섞기도 하고, 반복해서 흙물을 올리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실험을 해나가기 시작했지요.”
실험은 2년이나 계속됐다. “처음부터 첨장을 염두에 두지 않았어요. 표면에 조각을 하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갈라지고 돌출되는 부분이 생기다 보니 점점 덧바르는 횟수가 많아지는 거예요. 그렇게 겹치는 부분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한번 계속해서 덧발라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첨장기법의 핵심은 흙물의 퇴적현상이에요. 말렸다 발랐다 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도자 표면에 슬슬 돌기가 돋아나기 시작하지요. 반건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해서 비닐에 물을 묻혀 기물 주변으로 덮어주기도 하고 습도와 건조 시간을 확인하면서 점점 시행착오를 줄여나갔어요. 처음에는 거칠고 불규칙한 돌기가 나오더라고요. ‘떡이 진다’고 표현하는데 특정 부분이 뭉개지기도 하고 표면이 갈라지기도 했어요. 흙의 농도와 습도, 건조일수를 조금씩 바꿔가며 계속 실험했는데 뭔가 답이 보이는 것 같으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계속 파고들었지요. 그렇게 2년이 흐른 거예요(웃음)”.
가장으로서 일을 그만두고 마음 편히 실험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 몸 고생, 마음고생도 많았다. 
“그때가 30대 초반이었는데 눈치를 볼 수밖에 없죠. 부모님의 도움도 받고 투잡, 스리잡을 뛰었어요. 물레체험교육 같은 행사가 열리면 ‘알바’로 물레를 차주기도 하고 건설 현장에도 나갔어요. 조경도 해보고요.” 
적당히 타협하거나 대충 매듭을 짓겠다는 생각은 안 했다. 
“제 정체성을 찾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걸 확보하기 전까지는 도저히 일을 못 하겠더라고요. 제가 하는 일이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새로운 감성과 디자인, 논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걸 찾기까지 시간이 걸린 거죠. 작가들이 그래요. 명분이 없으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고집스럽기도 하고 독선적인 면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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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해서 더 아득한 질서
힘들게 구현한 첨장은 곧 그 논리와 미감을 인정받았다. 2005­년 그는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공모전에서 첨장기법을 적용한 작품으로 대상을 받는다. 43개 국가에서 1,10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된 큰 행사였다. 당시 심사평을 찾아보면 “새로운 기법의 작품이다” “멀리서 볼 때보다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설수록 신비감이 더해진다”라는 평이 많다. 
벌써 15년 전, 첨장기법은 그 뒤로 계속 고도화돼 지금은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디자인과 크기가 그만큼 다양해졌고 완성도와 디테일도 더 뾰족해졌다. 돌기만 따로 떼어내 다른 도자판에 이식하듯 심는 등 확장과 변이도 활발하게 일어나는 중이다. 개인적으로는 흰 원형 도자판에 저마다 조금씩 다른 생김새의 돌기가 빙 둘러 심어진 작품을 좋아한다. 돌기는 성냥개비처럼 작지만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존재 같아 물끄러미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윤주철 작가와 이야기하다 보면 은근 빨려드는 부분이 있고 웃는 순간도 많은데 그건 그가 고집은 물론이고 융통성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레 성형을 하지 않고 캐스팅을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 
“청주대학교를 나왔는데 4학년 때 전국물레성형경진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어요. 지역 예선을 치르고 각 지역 우승자들과 다시 실력을 겨루는 구조였는데 청주 지역 예선에서 1등을 했습니다. 제가 물레를 좀 찼거든요. 그렇게 전국대회에 나갔는데 이건 명함 내밀 곳이 못 되더라고요. 초등학생 때부터 물레를 찬 분들이 즐비한 거예요. 평생 노력해도 그분들을 못 따라잡겠더라고요. 안 되겠다, 나는 물레 대신 조형 작업으로 가자 했지요(웃음).”
단국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이수했는데 권오훈 교수를 만난 것도 계기가 됐다. 권오훈 교수는 석고틀을 이용하는 조형 디자인으로 유명한 이라 자연스럽게 ‘도자 디자인’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윤주철 작가의 작품 과정을 들여다보면 패션 디자이너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느끼는 지점이 있다. 형태와 색상, 치수와 크기를 고려한 컬러 스케치가 많은데 그렇게 디자인이 결정되고 나면 석고틀로 원형을 만들고 그 위에 첨장기법으로 ‘돌기의 질서’를 구현해 낸다. 디자인 작업이 부분부분 많이 들어가는 공정이고, 완성된 결과물은 손의 노동과 색의 질서로 우리가 보던 과거의 도자와는 또 다른 세계를 열어 보인다.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서도 본 것도 바로 그 세계였을 것이다. 수려한 리듬과 손의 맛, 그리고 아득한 몰입의 힘을 동시에 갖고 있는.  

1 과거의 도자와는 전혀 다른 색과 형태, 그리고 기운의 작품들. 가까운 미래에 ‘뉴 노멀’이 됐으면 하는 것이 윤주철 작가의 바람이자 목표다
2 강렬한 원색과 위풍당당한 형태가 매력적인 작품. 성수동에 있는 갤러리 소소단상 컬렉션 중 하나다 
3,4 윤주철 작가의 작업은 패션 디자인과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그저 둥글고 넉넉한 형태 대신 다양한 디자인과 파격을 즐긴다. 색깔 역시 노란색부터 보라색까지 거의 모든 원색을 사용한다. 화려하고 정교한 디테일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지만 곧 수양에 가까운 노동의 흔적과 질서의 미학의 도드라지면서 무심히 감상하게 된다  

글 정성갑 월간지 ‘럭셔리’와 네이버 디자인프레스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 20년 가까이 일했다. 한 점 갤러리이자 콘텐츠 제작?기획사인 ‘클립clip’을 운영한다  
사진 제공 윤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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