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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호 Vol.369

조선의 코벤트 가든을 만나다

경계를 넘는 예술 | 혜원 신윤복의 ‘쌍검대무’

혜원 신윤복의 ‘쌍검대무’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쌍검대무’를 통해 조선의 춤과 음악을 엿보다

런던 귀족에게 오페라가 있었다면 한양 선비에겐 칼춤이 있었다. 런던 귀족이 코벤트가든에 모였다면 한양 선비는 뒷동산에 모였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 고정된 무대와 관람석이 있었다면 뒷동산에선 돗자리를 펴는 그 자리가 무대가 되고 관람석이 됐다. 이는 이불 펴는 자리가 침실 되고 밥상 놓는 자리가 식당 되는 원리와 같다. 우리 조상들은 돗자리를 들고 다니다가 적당한 곳이 나오면 돗자리를 굴렸고 그러면 그곳은 무대가 됐다. 그래서 필자는 돗자리를 이렇게 부른다. ‘포터블 스테이지’. 

야외 공연을 즐기다
왜 우리나라에는 실내 공연장이 없었을까? 우리 조상들은 실내 놀이도 햇빛 아래에서 바람맞으며 하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놀이를 ‘풍류風流’라고 불렀다. 추운 겨울에는 야외에서 바람을 누리기 어려웠기 때문에 모든 놀이와 공연이 ‘시즌 오프’가 된다. 그러니 옛날 공연 애호가들은 봄에 진달래 피기만 기다렸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돼야 풍류도가 살아났다. 
숙종 때 조선 공연 문화에 새 장르로 등장해 이후 예술이 된 것이 칼춤이다. 이는 르네상스 시기에 등장해 예술이 된 오페라와 견줄 수 있다. 오페라에 프리마돈나가 있듯 칼춤에는 기녀가 있다. 여인 둘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을 춘다고 해 이를 쌍검대무雙劍對舞라 한다. 조선 검무의 본고장은 경상남도 밀양이다. 밀양에서 칼춤을 익힌 기녀들은 한양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흩어져 검무를 퍼뜨렸으니, 이들은 칼춤을 원하는 곳이 있으면 찾아가 공연을 펼치는 프리랜서 무용수였다. 

‘혜원전신첩’에 담긴 ‘청금상련’


칼춤 그리고 음악의 황홀함
오페라에서도 가수만큼 중요한 것이 음악을 맡은 오케스트라이듯 칼춤에서도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이 중요하다. 한양의 악공 대부분은 음악을 담당한 관청인 장악원掌樂院 소속이었는데 장악원은 오늘날로 여기면 국립국악원으로 남산 아래에 있었다. 장악원 악공들은 국가 행사 때 음악을 담당했고, 때때로 개인 행사에도 불려가서 곡을 연주했다. 그러니까 장악원 악공들은 ‘투잡’을 뛴 셈이다. 특히나 개인 행사에서 칼춤에 음악이 곁들여질 때, 여섯 개의 악기가 참여해 음악 또한 춤 못지않게 화려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 후기 개인이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공연이 칼춤이었다. 
기록 남기길 좋아한 선비들은 칼춤을 관람하고 때로는 시로, 때로는 산문으로 감상평을 남겼는데, 한결같이 칼춤의 황홀함을 찬탄했다. 문인들이 문장으로 칼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면 화가들은 그림으로 칼춤을 실감 나게 옮기고 싶었을 것이다. 누가 조선 최고의 공연인 칼춤을 화폭에 옮길 것인가. 당연히 최고의 화가에게 그 임무가 주어진다. 그런데 화가는 춤만 담아서는 안 된다. 악공도 담아야 하고 이를 감상하는 관객도 담아야 한다. 그러니까 오늘날 로열 오페라 하우스 공연을 비디오 카메라로 구석구석 담는 역할이 조선 화가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도 한 컷으로. 이를 감당할 이는 단 한 명이다. 

‘혜원전신첩’에 담긴 ‘상춘야흥’


화폭에 칼춤을 담다 
조선 칼춤 공연 최고의 비디오 디렉터는 조선 양반풍속화의 달인 혜원 신윤복이다. 신윤복은 정조 시절 한양 선비가 야외에서 벌인 ‘쌍검대무’ 공연에 비디오 디렉터로 초청됐다. 그럼 지금부터 신윤복이 녹화한 이날 공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가로 35센티미터, 세로 28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화폭에 등장인물은 총 16명이다. 그런데도 화면이 답답하거나 좁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데 이는 공연 전체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이 많아서 바닥에 깐 돗자리도 7개나 되고 돗자리의 크기도 제각각이다. 
이날의 주인공인 칼춤을 추는 기녀들이 올라간 돗자리는 화면 오른쪽 끝에서 시작해 화면 왼쪽 바깥으로까지 이어져 진정한 이동식 무대로 손색이 없다. 
양손에 쌍칼을 잡은 기녀들은 모두 자주색 전복戰服을 덧입고 머리에는 전모氈帽를 썼다. 이는 군교軍校의 옷인데 춤 도구가 칼이니, 복장도 군인 복장을 한 것이다. 모자는 공작 깃털로 장식해 화려함이 배가됐고, 전복은 폭넓은 푸른 띠로 묶어 우리 옷의 아름다움이 끈치레임을 보여준다. 왼쪽 기녀는 붉은 치마로 양의 기운을, 오른쪽 기녀는 푸른 치마로 음의 기운을 뜻하니 칼춤은 옷에서도 우주의 질서를 연출한 것이다. 왼쪽 기녀는 뒷모습으로 오른 버선발을 가볍게 들었고, 오른쪽 기녀는 앞모습으로 왼 버선발 뒤꿈치를 살짝 들었다. 
신윤복은 알았다. 기녀들의 버선발 하나는 허공에 있어야 춤 장면이 더욱 신명 난다는 사실을.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니 오른쪽 기녀의 푸른 치마 끝이 묶여 있다. 그러니까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치마 끝을 단단히 묶고 춤을 췄다는 것을 신윤복은 놓치지 않았다. 오른쪽 기녀의 자줏빛 옷자락이 바람에 마구 휘날리니 야외 공연의 맛이 여기에 있구나! 

악공들의 생김새를 그리다
오페라에서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무대를 등지고 앉지만 칼춤에서는 악공들이 무대를 바라보고 앉는다. 여섯 악공이 두 개의 돗자리에 나눠 앉았는데 맨 오른쪽 북재비만 모자와 옷이 다르고 조금 떨어져 앉았다. 아마도 악공들의 리더가 북재비인 듯하다. 나머지 다섯 악공은 모두 갓과 도포 차림이다. 옆의 장구재비가 북재비를 향해 앉은 것으로 보아 둘이 장단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듯하다. 왼쪽에는 대금, 다음 둘은 피리, 마지막이 해금이다. 그런데 해금주자는 고개를 완전히 돌려 북재비를 향했는데 아마도 신윤복은 이 당시 악공들의 생김새를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해금주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수염이 아직 안 나 앳된데 화장까지 했다. 아무튼 이러한 악기 구성을 삼현육각三絃六角이라 하는데 조선 시대 춤음악의 기본 구성인 듯하니 김홍도의 ‘무동舞童’ 그림 속 악기 구성도 이와 같다. 
신윤복의 연출력은 악공들이 입은 도포색의 미묘한 변화 속에 있다. 이날 악공들의 드레스코드는 푸른색 도포인데 똑같은 푸른색이 하나도 없다. 그러면서도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이런 경지를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조화harmony인데 조화는 음악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조화를 사랑하는 이들을 필하모니커Philharmoniker라 하지 않는가. 
해금주자 왼쪽에는 큰 돗자리에 선비 홀로 앉았다. 다른 돗자리와 달리 테두리에 푸른 천을 덧대었는데 이는 돗자리의 주인이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왼손으로 긴 수염을 쓰다듬고 오른손엔 얼굴을 가리는 부채인 차면선遮面扇을 들었다. 아마도 이 선비는 얼굴을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위치에 있는 듯하다. 무대 돗자리 바로 앞에는 이날 공연을 주최한 선비인 듯한 인물이 역시 푸른 천을 두른 큰 돗자리를 혼자 차지하고 있다. 왼손에 부채를 들고 몸은 죽침에 기댔으며 가슴에 자주색 띠를 둘러서 높은 품계의 인물인 것이 확인된다. 선비 앞에는 담뱃대·담배함·재떨이·화로가 놓여 있어 공연을 감상하며 담배를 태우는 모습임을 알 수 있는데 오늘날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다. 
마지막에는 돗자리 2개를 이어서 공연을 주최한 선비의 친구와 이들의 아들 둘이 기녀들과 함께 자리했다. 친구와 기녀 둘은 칼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데 반해 아들 둘은 모두 춤에는 관심이 없다. 갓 쓰고 부채 든 아들은 갓이 불편한 듯 갓끈을 만지고 얼굴엔 약간 뿔이 나 있다. 아직 춤 공연의 재미를 알 나이가 아닌데 아버지 손에 이끌려 억지로 앉아 있으니 심통이 날 만도 하다. 오른쪽 아들은 초립을 쓴 것으로 보아 아직 혼례는 올리지 않은 듯한데 눈길은 옆에 앉은 기녀들한테 가 있다. 칼춤보다도 옆의 기녀들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닐까. 앉은 기녀들도 치마색 농담을 달리해 변화를 주었고 저고리 색은 모두 옅은 옥색으로 해 칼춤 추는 기녀들의 화려한 자태에 방해되지 않게 했다. 

다채로운 국악의 향연
이렇게 해서 칼춤 추는 기녀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닥에 앉았으며 오른쪽 담뱃대를 든 시동만 신발 신고 땅 위에 섰다. 아마도 담뱃대를 가져오다가 춤 감상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멈춰 선 모양이다. 덕분에 칼춤 추는 기녀들의 동세가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이를 동정의 대비라 한다. 뛰어난 비디오 디렉터 신윤복 덕분에 감상자들은 방 안에서 칼춤 공연의 생생함을 경험하게 되는데 아쉬운 것은 신윤복 그림은 비디오와 달리 음성 지원이 안 된다는 사실이다. 만약 감상자가 조선 시대 사람이라면 음성 지원이 안 돼도 저 삼현육각의 소리가 귓가에 울리겠지만 오늘날 국악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겐 남의 나라 음악일 뿐이다. 
‘쌍검대무’가 들어 있는 화첩인 ‘혜원전신첩’에는 총 30면 가운데 6면에서 곡이 연주되는데 가야금 독주부터 생황과 대금 이중주, 대금과 해금과 거문고 삼중주, 피리 둘과 해금과 장구 사중주 등 그야말로 다채로운 국악의 향연이다. 그래서 신윤복 감상의 마지막은 국악에 도움을 받는다. 결국 전통문화란 어느 하나만 알아서는 완전하지 않다. 여러 분야를 다 같이 할 때 진정한 전통의 멋은 복원될 것이다.

탁현규 간송미술관 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동덕여대에 근무 중이다. ‘그림소담’ ‘고화정담’ ‘사임당의 뜰’을 펴냈다
그림 간송문화미술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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