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호 Vol.3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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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고유의 미학을 잃지 않으면서도 극적 요소를 확대하기 위한 고민의 연속. 결과적으로 황호준은 밀도 높은 음악으로 감동을 직조해 냈다. 그의 작곡 노트를 들여다본다 창극 ‘아비. 방연’의 재연 소식을 듣고, 당시의 고된 과정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처음 대본을 접했을 때, 작품을 지배하는 정서의 밀도가 워낙 촘촘한 데다 시종일관 휘몰아치듯 빠르게 전개되는 극의 템포에 적잖이 당황한 기억이 난다. 창극의 전형적 서사와는 전혀 다른 구성이었고, 결이 다른 비극성을 구현해야만 했다. 음악 구상은 초기 단계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결국 나는 대본을 거의 외울 정도로 수십 번 정독하고 나서야 주요 캐릭터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고, 극을 이끌어가는 배역들의 주제음악을 시작으로 작곡에 들어가게 됐다. 애초에 ‘아비. 방연’은 마치 대사하듯 소리가 분절적으로 교차하길 원했다. 이를 위해 각 인물의 소리와 합창을 정교하게 배치해야 했고, 이 분절된 노래들이 대사 사이에 뒤섞여 있으니 매우 복잡한 음악적 계산이 요구됐다. ⓒ황필주 Studio79 기본을 잃지 않기 위해 전통 판소리 서사의 가장 큰 특징은 소리꾼이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것이다. 환갑이 넘은 명창이 심청이나 춘향이가 돼 소리를 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할머니가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를 손주에게 들려주면서 호랑이 흉내를 내는 것처럼, 능숙한 이야기꾼으로서 심청이나 춘향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극은 역할극이다. 인물을 사실적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점이 판소리와는 다르다. 판소리의 주요 눈대목은 상황을 설명하고 묘사하는 소리가 많은데, 이 때문에 창극에서는 해설자와 같은 도창을 둔다. 창극 ‘아비. 방연’에서도 도창은 매우 중요하다. 도창의 적극적 역할은 ‘아비. 방연’이 연극적 요소가 강한 밀도 높은 역할극이면서도 판소리에 기반을 둔 창극이 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도창은 장면과 장면 사이에 등장해 긴 소리로 상황 설명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극 안에서 짧은 노래로 정서의 밀도를 높이거나 무대에서 구현되는 장면을 소리로 동시에 담아내 전달하는 역할이다. 판소리 어법에 따른 전통 소리가 극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며, 이면에 맞는 소리 가락의 흐름을 짜는 것은 여전히 힘든 작업이었다. 소리꾼들의 성음이 극과는 무관하게 기교와 기술의 구사로 흘러가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효과적으로 극적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시김새 표현의 강도를 조절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다시 ‘아비. 방연’을 준비하고 있다. 처음부터 다시 만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초연 후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일부 주요 배역이 교체되기도 했다. 따라서 배역별 소리 특성을 파악하고 그에 맞게 가락을 안배해야 했다. 수정된 대본에 따라 추가된 소리 대목을 다시 작곡, 구성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연결되는 음악 역시 새로 만들었다. 만만치 않은 작업으로 기억되는 기악 역시 다시 구상하고 있다. 전통 타악기와 피아노·클래식 기타를 기본 반주 편성으로 배치했고, 극적 정서를 극대화할 수 있는 악기로 아이리시휘슬·리코더·오카리나 등의 목관악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전통적 성음은 거문고가 담보해 낼 것이다. 초연 편성에 대금과 아쟁을 더해 전통 가락의 성음은 더 강조한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창순 선생님이 초연 당시 공연을 보시고는 “아주 잘 봤네. 판소리가 아닌 창극을 보고 눈물을 흘린 건 이번이 처음이네”라며 손을 지그시 잡아주신 일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동안 창극을 포함해 오페라·뮤지컬 등 다양한 양식의 음악극 작업을 해왔지만, 거듭하면 할수록 우리 창극이 갖는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특히 국립창극단과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매번 고되면서도 보람이 크다. ‘아비. 방연’은 내게도 특별한 작업이었다. 소리조 사설과 노랫말은 시적 은유가 가득한 아름다운 언어였고, 한아름 작가가 풀어놓은 비극적인 이야기는 다양한 영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 이야기를 무대라는 공간에 조직해 내는 서재형 연출의 집요함은 지독할 정도로 섬세했다. 내가 작곡에 참여한 창극이 현대 창극의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판소리와 소리꾼에 대한 단단한 존경의 마음과 전통 창극이 굳건하게 이어지면서 다른 결의 다양한 창극이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작곡가로서는 큰 복이다. 초연 당시 작곡 노트에 이 작품이 방연이 짊어진 무게만큼이나 힘든 짐을 이고 살아가는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 작은 위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성장한 두 딸, 그리고 어느덧 아버지가 된 나를 발견하며 방연의 사연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공연 순연으로 지난 2월호 기사를 다시 게재합니다 글 황호준 ‘아비. 방연’에서 작·편곡과 음악감독을 맡았다. 창극 ‘메디아’ ‘오르페오전’ 등 국립창극단과 다양한 작업을 하며 창극의 지평을 넓히는 데 힘써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