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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호 Vol.369

평범한 아비의 이야기

미리보기 넷 | 국립창극단 ‘아비. 방연’



가족의 의미가 더욱 애틋하게 느껴지는 요즈음. 역사의 파도에 휩쓸린 아비, 방연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어쩔 수 없음’이란 비극, 연출가 서재형

서재형·한아름 콤비의 첫 창극 도전작은 ‘메디아’였다. 복수를 위해 자식들을 살해하는 매서운 어머니를 그렸던 이들은 두 번째 창극에서 자식을 위해 신념을 굽혀야 했던 방연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딸아이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왕방연을 다룬 창극 ‘아비. 방연’이 5년의 공백을 깨고 다시 무대에 오른다. 

“작품의 핵심 갈등은 좋아하는 사람이 둘 있는데 그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비롯돼요. 전형적인 비극 상황이죠.” 

비극적 인물은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가치가 대립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아비. 방연’의 왕방연 역시 자식을 구하기 위해서는 임금을 배신해야 하고, 반대로 임금을 따르면 자식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 등 역사가 기억하는 영웅적 인물들은 대개 개인의 가치를 희생하면서 대의를 따른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들을 전형적 비극의 인물로 본다. 왕방연은 그 반대다. 왕방연이 기존의 비극적 인물과 다른 점이라면 다른 선택을 했다는 점이 아니라, 그가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출가 서재형은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전달하러 간 장면으로 꼽는다. 어쩔 줄 모르고 머뭇거리는 방연에게 단종은 딸을 구하러 가라고 말한다. ‘어쩔 수 없음’은 ‘아비. 방연’의 개인적 비극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이다. 

“왕방연이 비극적인 인물인 것은 그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는 점이에요. 그는 계유정난이나 한명회라는 힘에 휘둘리는 평범한 인물일 뿐이죠.” 

창극 ‘아비. 방연’의 비극성은 평범한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데서 나온다. 

“주어진 운명을 돌파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멈춰 서버린 방연이 평범한 우리 부모님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작품은 개인이 처할 수 있는 또 다른 비극을 보여준다. 영웅적 인물을 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비극과는 거리를 두면서, 영웅담이 아닌 평범한 부모의 사랑을 보여주는 이야기여서 관객은 좀 더 친근하게 공감하게 된다. 2015년 짧은 기간 올린 초연에서 보여준 관객의 뜨거운 반응은 평범한 부모로서 방연의 아픔에 공감했기 때문이리라. 

“다양한 형식의 비극이 있을 텐데 ‘아비. 방연’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작품이에요. 요즈음은 개인적으로 영웅담보다 이런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를 편하게 전하는 방식을 더 좋아해요.” 

창극 ‘메디아’에서는 음악극 또는 오페라 형식으로 창극을 구현한 그가 ‘아비. 방연’에서는 연극적인 창극을 선보였다. 연극 형식이 평범한 사람의 비극을 보다 친밀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처음 이 작품의 제목은 ‘방연’이었다. 작품을 개발하면서 ‘아비. 방연’으로 바꿨다. 그만큼 ‘아비’로서의 방연의 모습에 집중하겠다는 의도다. 초연 이후 5년이 지나고 서 연출에게 ‘아비’라는 의미가 조금은 다르게 다가왔다. 

“초고 대본을 다시 읽어보니 초연 때는 공연에 넣지 못한 부분에 방연의 사연이 다 있더라고요. 착한 아내 만나서 영특한 아이를 낳았지만 아내를 먼저 보내고 혼자서 아이를 키워온 거죠. ‘아비’라고 쓰지만 ‘부모’라고 읽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은 엄마?아빠의 역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부모라는 개념이 강한 시대잖아요. 함께 만드는 사람들과 이런 확장된 생각을 공유하면 관객도 좀 더 다른 느낌을 받지 않을까요.” 

재공연에서는 ‘부모’에 대한 넓어진 생각이 작품 곳곳에 묻어날 것이다. 그리고 초연과 달리 몇몇 장면은 노래로 표현될 수도 있다. 소리로 풀어내는 것이 나을 것 같은 대목들은 연습 과정에서 노래로 전환해 볼 생각이다. 

“연습 중 소리를 붙여서 사족이란 생각이 들면 아마도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죠.” 

그런 과정을 거쳐 새로워진 한두 곡은 관객들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방연 역은 초연에 이어 국립창극단원 최호성이 맡았다. 서 연출은 압도적인 소리를 지닌 최호성이 방연 역에 적역이라고 봤다. 

“최호성 배우가 결혼 전인데도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고, 내 새끼야’ 하며 딸을 대하는 태도가 정말 아빠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초연 준비하면서 굉장히 힘들었다고 하던데 그건 정말 성실하게 준비했다는 말이겠죠. 이번에도 그런 자세만 유지하면 방연이 그의 인생 캐릭터가 될 거라고 확신해요.”



왼쪽부터 배우 최호성, 연출가 서재형 ⓒ황필주 Studio79


더 깊어진 방연이 되어, 배우 최호성

금부도사 왕방연에 관한 기록은 짧다. 역사서에는 단종을 유배지까지 호송한 인물이자, 유배지 영월로 사약을 전달한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창극 ‘아비. 방연’은 역사 속 짧은 기록에 상상력을 가미해 방연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작품이 주목한 것은 부모의 사랑이다. 초연 이후 재연에서도 방연 역은 최호성이 맡는다. 최호성에게 방연은 분명 이전의 작업과는 다른 새로운 도전이었다. 하지만 역할을 제안받았을 때 반가움이 컸다.

“‘아비. 방연’은 비극으로 시작해서 비극으로 끝나요. 이렇게 진중한 작품을 해보고 싶었어요.” 

작품에서 왕방연 역은 공연 내내 무대에 머문다. 퇴장하는 장면이 몇 되지 않는다. 그만큼 방연의 감정을 유지하면서 상황에 집중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과년한 딸을 둔 방연의 감정을 끌어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초연 때에는 20대 미혼에다가 조카들마저 어렸다. 주변에 아버지가 된 사람들을 눈여겨보면서 방연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대에서 아비인 방연을 훌륭히 표현했다. 그럼에도 작품이 끝나면 아쉬움이 남게 마련이다. 

“비극이니까 슬픈 감정에 치우칠 수밖에 없잖아요. 초연 때는 감정을 너무 일차원적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 싶어요. 우리 아버지들을 보면 힘들어도 티 안 내고 덤덤하게 표현하시잖아요. 덤덤한 게 오히려 더 슬플 수 있는데 그런 모습을 잘 살려내지 못했나 싶고요.”

최호성이 보는 왕방연은 충직하고 강직한 사람이다. 

“의리도 있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주군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대쪽 같지만 여린 사람이에요. 서재형 연출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왕방연의 단종과 소사(딸)에 대한 마음은 49대 51도 아니고 딱 50대 50이다. 단지 딸 쪽에 깃털 하나가 더 올라가서 그쪽으로 기운 것이지 둘에 대한 마음의 크기는 똑같다. 이 말씀이 방연의 캐릭터를 잡고 감정의 틀을 잡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딸을 구하기 위한 방연의 행동에 대해서도 충분히 동의한다. 

“그 당시 유교적인 사고에 따르면 대의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잖아요. 사육신이 그런 분들이었고요. 하지만 아비로서 방연의 선택을 욕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겠지만, 충분히 이해가 돼요.” 

최호성 역시 방연과 같은 상황이라면 같은 결정을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방연의 삶은 딸을 위해 희생을 각오하면서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방연이 사육신의 가족을 도륙하고 나자 도창이 “한 명은 살아서 묻히고, 한 명은 죽어서 묻히는구나”라고 노래한다. 방연을 살아 묻히는 인물로 파악한 것이다. 이후 방연의 삶은 딸을 위해서만 의미가 있었을 뿐이다. 방연의 지난한 노력에도 딸은 실성하고 만다. 그런 딸을 업으며 방연은 “왜 이렇게 가벼우냐, 새털보다 가볍구나. 다시 아이가 된 것이냐”라고 말한다. 아비로서 방연의 심정이 절절히 느껴지는 대사다. 인물의 폐부를 찌르는 대사 때문에 끝까지 감정을 잡아갈 수 있었고 공연마다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최호성은 작품에서 이 두 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초연이 끝나고 최호성은 한동안 방연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작품 끝나고 극 중 인물의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감정이 남아 있을까,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방연은 정말 오랫동안 그의 가슴에 남았다. 공연 이후에도 방연을 놓아 보내지 못하는 경험을 했다. 혼자 단종이 유배당한 영월을 찾아 왕방연의 시조비를 보면서 그곳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방연을 맞는 기분이 특별하다. 

“제가 방연의 감정을 잘 잡아내서 보여줄 수 있을지 여전히 두려워요. 당연한 욕심이겠지만 초연 때보다는 더 나은 연기를 보여줘야 하잖아요. 방연을 다시 연기한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한층 더 깊이 있는 감정을 관객에게 오롯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겁이 나요. 왕방연이 가진 딸과 단종에 대한 마음이 50대 50인 것처럼, ‘아비. 방연’ 재연에 대한 반가움과 두려움이 딱 50대 50이에요.” 

한층 성숙해졌을 최호성의 방연을 기대하게 되는 말이다.


국립창극단 ‘아비. 방연’

2020년 10월 30일~11월 8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R석 5만 원 S석 3만 5천 원 A석 2만 원

02-2280-4114


박병성 월간 ‘더 뮤지컬’ 국장. 무대나 스크린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저서로 ‘뮤지컬 탐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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