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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호 Vol.369

사랑의 언어들

미리보기 하나 | NT Live ‘시라노 드베르주라크’

ⓒMarc Brenner

마치 랩 배틀을 보는 듯하다. 화려한 무대와 의상, 음향이 갖춰져야 ‘완성된 공연’이란 고정관념이 산산이 부서진다

유독 크고 괴상하게 생긴 코 때문에 외모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남자, 시라노. 자신을 흉측하게 보는 사람들에겐 공격적이지만 사랑하는 여자 록산 앞에선 한없이 작아진다. 1897년 프랑스 작가 에드몽 로스탕이 발표한 희곡 ‘시라노 드베르주라크’ 주인공 시라노의 이야기다. 전 세계인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내용 때문일까. 로스탕의 이 희곡은 다양한 장르에 적용돼 영화·뮤지컬·오페라 또 소설로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오는 10월 국립극장 NT Live로 상영되는 영국 연출가 제이미 로이드의 ‘시라노 드베르주라크’는 공감을 자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신선한 충격까지 준다. 작가 마틴 크림프의 섬세한 각색과 모든 장면을 뛰어난 시로 만들어버리는 연출가 제이미 로이드, 그리고 시라노 역에 당대 최고의 배우 제임스 매커보이를 캐스팅해 언어의 위대함과 배우의 신들린 연기만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결과는 성공적이다.
2019년 11월부터 2020년 2월까지 런던 플레이하우스에서 초연된 로이드의 ‘시라노 드베르주라크’는 뉴욕타임스나 가디언 등 저명한 언론계공연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비어 있지만 꽉 찬 무대
대사와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게 도와준 장치는 무엇일까. 역설적이게도 관객의 몰입을 돕기 위해 사용되던 무대장치를 몽땅 제거한 것이다. 공연장 어느 객석에서도 눈에 확 띄던 시라노의 시그너처인 커다란 코도, 17세기 파리를 떠올릴 만한 그 어떤 의상이나 무대 디자인도 없다.
마치 리허설 무대를 연상케 하는 빈 무대 위에 의자 몇 개와 무선도 아닌, 유선 스탠딩 마이크 몇 대만 사용한다. 심지어 배우들은 집에서 바로 나온 듯한 평상복을 입고 연기한다. 극의 배경은 원작 그대로 1640년대 프랑스지만 연출가는 이 지극히 로맨틱한 고전을 거침없이 현대화했다.
텅 비운 현대적인 무대는 오히려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검 대신 스탠딩 마이크로 전투 장면을 보여주고, 시라노의 큰 코를 (실제 배우의 코는 평범한 크기다) 더듬는 듯한 배우들의 손짓을 통해 17세기 프랑스와 원작 속 시라노의 모습을 마음껏 상상하게 한다. 무대에 신경을 크게 쓰지 않은 듯 보이지만 연출가가 가장 고민하고 세심하게 준비했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오히려 무대다.
총 5막 중 초반에 속하는 2막은 시라노의 친구 라그노가 운영하는 북카페에서 한창 글쓰기에 대한 논의가 오가면서 시작된다. 잠시 후 무대 배경으로 거대한 흰 도화지가 내려온다. 한 남자가 다가와 말없이 아주 천천히 도화지 위에 검은색 페인트가 묻은 붓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 한참 후에야 눈에 들어오는 고딕체의 단어들, “I LOVE WORDS THAT’S ALL(나는 언어를 사랑한다. 그게 전부다.)”
아무런 꾸밈없이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쓰인 문장. 이 간결한 단어들로 연출가가 무대를 그토록 순전하게 만든 이유를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Marc Brenner


NT Live이기 때문에 가능한 몰입도
배우들의 연기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이 작품에 NT Live는 최고의 플랫폼인 듯하다. 자신이 아닌 ‘잘생긴’ 크리스티앙과 사랑에 빠진 록산을 바라보는 시라노의 애정 어린 눈빛부터 자신이 대신 써준 러브레터에 감동한 록산이 크리스티앙에게 퍼붓는 키스 세례를 보며 억울함에 울컥하는 표정까지… 결정적 순간마다 카메라는 시라노를 연기하는 매커보이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이를 통해 그의 붉어지는 눈시울이나 농담할 때 나오는 장난기 많은 눈웃음까지 빠짐없이 엿볼 수 있다.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읽을 때도 록산이 아닌 카메라를 직시하며 내뱉는 현란한 말솜씨와 진심 어린 매커보이의 표정이 관객에게 직접 말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남녀불문 잠시라도 그 사랑 고백을 받아줄 수밖에 없을 만큼.
시라노뿐만 아니라 출연하는 모든 배우의 연기력과 매력 하나하나가  마치 손에 잡힐 듯 전달된다. 마치 언더그라운드 프리스타일 랩 배틀 같은 이 연극을 보면 모든 배우가 래퍼 출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배경음악이나 음향효과 하나 없이 배우들의 비트박스 위에 시절詩節 같은 대사가 얹어질 때마다 특히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관객에게는 경외감까지 불러일으킨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오래된 고전으로 이리도 충격적인 현대 연극을 만들어내다니.
이기주 작가의 책 ‘언어의 온도’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말과 글은 머리에만 남겨지는 게 아닙니다. 가슴에도 새겨집니다. 마음 깊숙이 꽂힌 언어는 지지 않는 꽃입니다. 우린 그 꽃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그동안 ‘시라노’를 보며 애처로운 콤플렉스 덩어리 주인공에게 때론 공감하고 위안을 얻었다면, 가슴까지 새겨지는 말과 글의 위대함이 극대화된 이번 제이미 로이드의 ‘시라노 드베르주라크’를 통해 또 다른 차원의 위안을 얻는다.
화려한 무대와 의상과 음향. 삼 박이 완벽히 갖춰져야만 ‘완성된 공연’이라는 고정관념을 깬 고전의 천재적 현대화다. 진정 ‘언어words’만으로 충분한 극이다.

NT Live ‘시라노 드베르주라크’
2020년 10월 14~17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전석 2만 원
02-2280-4114

임승혜 ‘코리아중앙데일리’ 기자. 2009년 입사 후 사회부를 잠시 거치고 2012년부터 쭉 문화부에서 다양한 공연과 클래식 음악 그리고 문화재를 보고 듣고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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