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7월호 Vol.3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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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저 예쁜 것, 예뻐 보이려고 애쓰는 것에는 마음이 가질 않았다. 그러다 마음에 들어온 못. 그때부터 저마다 독특한 못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 확신의 길목에 조선 시대의 오래된 못들이 있었다 그녀가 가져온 공구함에는 각양각색의 못이 빼곡했다. 머리가 둥근 못부터 머리가 버섯처럼 큰 못, 십자군 원정대의 상징처럼 생긴 못, 꺽다리처럼 길쭉한 못, 리본처럼 생긴 못…. 어떤 못은 머리가 호빵만큼 크고, 또 어떤 못은 책갈피처럼 얇았다.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생김새의 못이 있는지 미처 몰랐다. 그 못들은 실제 못으로 쓰이는 것들이다. 황동못이라 쇠못이나 콘크리트용 못보다는 강도가 약해 드릴로 미리 구멍을 뚫고 조심조심 박아야 하지만 그렇게 고정하고 나면 엄연히 못의 기능을 한다. 성수동에 있는 그녀의 작업실은 못의 쇼케이스 같았다. 머리가 쟁반처럼 큰 못이 선반 아래쪽에서 불쑥 튀어 올라와 그 위로 책을 쌓아두는 수납장부터 콘크리트 벽에 박힌 동그랗고 큰 못까지 온갖 못이 곳곳에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녀는 못을 벽에 박는 과정을 가끔씩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올리는데 별생각 없이 쿵쿵 때리던 못만 보다가 조형미가 뛰어나고 개성도 뚜렷한 못들이 조금씩 박히는 모습을 보자니 신선하고 재밌어서 계속 보게 된다. 그녀가 만드는 못들은 눈으로 보고, 손에 쥐고, 벽에 박고, 마침내 제자리를 찾고 난 후까지 쭉 ‘주연’이다. 대체 불가한 생김새와 분위기, 기운을 가진 작품들. 무언가를 걸지 않고 가만 박혀만 있어도 공간이 근사해지는 작은 예술. 워낙 특별한 생김새들이라 굳이 무언가를 걸 일이 없는데도 시각적 환기와 공간 장식을 위해 그녀의 못을 찾게 된다. 벽에 고정하지 않고 책상이나 화장대·식탁 위에 올려두는 이도 많다. 어떤 것은 대충 만든 것 같고, 또 어떤 것은 공을 들여 정교하게 만든 것 같은데 못의 그 작은 몸체를 가만 들여다보고 만지작거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녀가 못을 만든 지는 꽤 됐다. 대학원을 가는 친구도 많았지만 학부를 졸업하면 바로 작가로 활동하고 싶어 소재와 주제를 고민하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 못이 튀어나왔다. 예쁜 티를 내고, 예뻐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에는 관심이 가지 않던 차였다. 중요한데 중요하게 대접받지 못하는 것들, 큰 역할을 하는데 숨겨지는 것들로 작업하면 어떨까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그때부터 못을 만들었다. “부속물·부품으로 작업하면 좋겠다 생각하며 작업이 될 수 있는 소재들을 찾아나갔어요. 그러다 눈에 못이 들어왔는데 기능이며 형태, 길이와 굵기를 달리하며 변화를 줄 수 있겠더라고요. 어떻게든 못 자체를 주인공처럼 부각하고 싶어 주변으로 나무틀을 짜 액자처럼 만들고 선반 옆쪽에 큼지막한 못을 고정하고 나무 표면을 4B 연필로 새까맣게 칠하는 식으로 계속 이런저런 실험을 했어요. ‘못의 위안’ ‘못을 위한 오마주’가 작업의 중심이었던 것 같아요.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해요. 무섭다고 하는 분도 있고, 작품이 ‘쎄서’ 남자 작가인 줄 알았다는 분도 있어요. 못 박힌 예수를 떠올리며 종교적으로 보시는 분도 있고, 귀엽게 봐주시는 분도 있어요.” 차분한 말투의 그녀는 단어를 골라가며 천천히 말했는데 논리와 흐름이 정확했다. “인터뷰를 몇 번 안 해봐 걱정을 많이 했다”라는데 작업에 대한 소신이 확고해서 말에 힘이 있었다. 2, 3 4 그 많던 조선 시대 못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세상 모든 창작자가 넘어야 할 허들은 자기 의심이다. 내가 괜찮은 작업을 하고 있나? 이렇게 계속해도 되나? 하는 의심을 넘어야 마침내 자기 확신이 생기고 그 확신이 엔진처럼 심신에 장착돼야만 꾸준히 오래 작업할 수 있다. 그녀에게 그런 확신을 준 계기는 한 권의 책이었다. 출판사 동인방에서 나온 ‘조선 시대의 못’. “잠깐만요” 하고 그녀가 서가에서 가져온 책은 그야말로 ‘못의 세계’라 할 만했다. 조선 시대 가구에 쓰인 각양각색의 못을 소개하는데 못의 재료와 형태 분류, 고정과 장식을 넘나드는 다양한 역할까지 못의 모든 것을 집대성하듯 정리돼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다양한 디자인. 콩나물 대가리부터 연꽃까지 실로 다양한 디자인이 그 안에 있었다. 변주하는 솜씨도 놀라워 머리가 양 끝에 둘인 못, 머리가 없는 못, 머리가 둥글넓적한 못, 머리가 고리 모양인 못, 머리가 평균대처럼 가로로 긴 못 등 머리를 중심으로만 살펴도 10여 개의 다른 디자인이 넝쿨처럼 따라 올라왔다. 궤에 쓰인 동그란 못과 그 아랫부분의 받침쇠는 그 자체로 ‘꽃’이었다. 이 책은 이윤정 작가에게 그대로 영감의 원천이자 ‘나도 다양한 디자인의 못을 만들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으로 돌아가 박혔다. “이층장이나 머릿장에는 장석이 많이 붙는데 그걸 고정할 때는 동합금못을 사용하고 목가구에는 대나무를 포함해 강도가 있는 나무못을 사용했더라고요. 용도에 맞게 모양이 다르고 생김새에 따라서도 저마다 이름이 있는 것이 신기했어요. 못이 옛날부터 중요한 역할을 했구나 하는 마음도 들고요. 그때부터 고가구를 보면 못이 먼저 보이더라고요. 구리·상아·대나무 등 다양한 재료로 못을 만들었는데 치장을 위해 청동으로 길게 만든 못은 꼭 비녀 같아요. 옛날에는 못도 이렇게 다양했구나,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많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제 작업에 확신을 갖게 됐어요.” ‘이윤정표 못’은 특히 질감이 매력적이다. 점토나 나무를 이용해 원하는 모양을 만든 후 실리콘에 묻히면 점토와 나무의 물성과 질감이 고스란히 살아난다. 그렇게 주물을 뜬 못에 은을 입히기도 하고, 색을 칠하기도 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못을 택한 결정 너머 좀 더 근원적인 그녀의 성향이 궁금했다. 누구에게도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이 못이지만 아무나 못을 택하는 것은 아니니까.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긴 해요. 새로운 물건이나 사람에 익숙해지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고. 누구를 만나도 마음이 빨리 열리는 성향은 아니에요. 사람도 그런데 특히 사물을 볼 때면 중심에 있는 존재보다는 그 주변에 있는 것들에 눈길이 가요. 조용히 있지만 제 목소리를 내는 것들이요.” 그녀의 못은 앞으로 좀 더 ‘큰’ 방향으로 진화할 예정이다. “크기가 작은 못 작업을 오래 하다 보니 작업이 점점 작아져 좀 큰 작업을 하려고 해요”라는 그녀의 말에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아 함께 웃었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도 나눴다. 가만 못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생김새가 단순하고 그래서 대쪽처럼 명쾌한 이미지가 잡힌다. 기능상 끝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어 세련된 맛도 있다. 그러니 100배쯤 뻥튀기해 아주 큰 못을 만들고 정원이나 광장에 박으면 설치미술로도 꽤 근사할 것이다. 훌륭한 예술품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감상의 여지와 감정을 느끼게 하는데 그녀가 앞에서 말했듯 못을 보며 생각하고 떠올리는 이미지는 사람에 따라 확연히 다르니 큰 작업을 위해서도 못은 좋은 소재다. 이윤정 작가가 못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유려하고 율동적인 선이 매력적인 나뭇잎 모양의 장식물, 동그란 고리를 줄처럼 길게 연결해 손잡이에 걸고 쓰는 도어 홀더, 찰흙 놀이 하듯 쉽게 만든 방울과 고리, 열쇠와 못을 한데 달아 만든 자동차 열쇠고리 같은 소품부터 철제 수납장과 선반, 책상과 책꽂이까지 변주의 폭의 넓다. 최근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진행한 ‘다함께 차차차茶’ 전에서는 도예가 백경원의 다관과 함께 놓은 차 도구를 선보였다. 알루미늄과 황동으로 만든 작품들은 언뜻 고대 유물 같기도, 무심함이 매력적인 모던 사물 같기도 했다. 멋을 부리지 않았는데 가만 보고 있으면 은근하고 독창적인 멋과 기품이 묻어나는 것. 이것이 그녀 작업의 특징이자 매력인데 이런 작품들을 주르르 모아놓으면 저마다 고유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또 사이좋게 어우러지는 것이 볼수록 정감 있다. 1 이윤정이 만든 작은 오브제들. 조연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주연이다 2 이윤정의 못과 오브제들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독창적 미감을 보여준다 3 가구 옆면에 큼지막한 크기의 못이 상징적으로 장식돼 있다. 이윤정의 못은 점점 커지는 중이다 4 동그란 고리를 길게 이어붙여 만든 도어 홀더. 역시 ‘무심한 미감’이 돋보인다 글 정성갑 월간지 ‘럭셔리’와 네이버 디자인프레스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 20년 가까이 일했다. 한 점 갤러리이자 콘텐츠 제작?기획사인 ‘클립clip’을 운영한다 사진 제공 이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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