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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7월호 Vol.366

조울병, 창조성에 불을 지피다

경계를 넘는 예술 | 정신병과 예술의 상관관계

1811년 베토벤이 빈에 위치한 그의 스튜디오에서 피아노 작곡을 하고 있다 ⓒPictorial Press


예술가의 심혼과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이며, 그 사이를 흐르는 강력한 전류가 되는 정신 질환. 예술가와 조울병의 놀라운 관계에 대한 이야기 

예술가와 광기. 이 둘을 묶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애석하게도 예술가는 정신 질환에 취약하다. 아널드 루드비히 켄터키대학교 정신과 교수는 1800~1949년에 태어난 저명인사 1,004명의 전기를 분석했다. 그의 책 ‘천재인가, 광인인가?’는 예술가에게서 정신 질환이 얼마나 빈번하게 나타나는지 보여준다. 과학자·공무원·정치가·군인·사업가에 비해 유명 예술가들은 조울병에 더 많이 걸렸다.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에서 120만 명을 조사한 연구 결과만 봐도 예술가와 그의 가족에게서 조울병이 일반인에 비해 더 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꼭 조울병이 아니라도 예술가는 감정 변화가 심하다는 것을 이 연구는 객관적으로 증명했다.

광기의 아이콘 베토벤
베토벤은 28세에 난청이 시작됐다. 증상은 점점 악화됐고 32세에는 유서를 쓰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열정적이었지만 광기에 휩싸이기도 했다. 작곡에 몇 시간을 몰두한 뒤 엄청나게 쏟아지는 눈 속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음울하고 유머도 없다고 알려졌지만, 갑작스레 쾌활해지기도 했다. 들뜬 상태의 베토벤은 “작품이 완성되기도 전에 벌써 다른 작품을 시작한다. 작곡하는 속도가 지금 같다면 서너 곡을 동시에 만들어낼 수도 있다”라고 했다. 그의 친구는 “베토벤과의 대화보다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는 것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심기에 거슬리는 질문이나 설익은 충고를 하면 그와 영원히 의절할 각오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베토벤은 음악적 재능에 대한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자신의 전능함을 타인이 인정하지 않으면 폭발했다. 변덕스러운 감정과 과격한 언행 때문에 베토벤은 곤경에 빠지곤 했다.  


마이클 니컬슨의 사진으로 그린 슈만 ⓒPictorial Press

조울병, 창작 욕구를 북돋우다 
감정의 오르내림이 창작 욕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슈만의 일대기가 선명하게 보여준다. 슈만은 조울병을 앓았다. 그의 생전 편지를 분석해서 정서 상태에 따라 작곡한 작품 숫자를 비교해 보니 흥미로운 연관성이 발견됐다. 그는 아내 클라라와 러시아 여행을 다녀온 직후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죽음에 대한 공포, 중금속에 중독될지 모른다는 피해망상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의 나이 34세가 되던 1844­년에는 단 한 곡도 만들지 못했다. 반면 조증 시기에는 옮겨 적기 벅찰 만큼 악상이 샘솟아 현악 4중주곡을 2주 만에 3편 작곡할 정도였다. 조증을 앓던 1840년과 1849년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작품이 나온 해다.
조울병 환자는 조증 기간에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우울 기간에는 기진맥진해서 은둔 생활로 들어간다. 우울증은 분명 괴로운 것이지만 이때 숙성된 감성은 에너지가 상승하는 조증 시기에 예술로 표현된다. 제이미슨 존스홉킨스대학교 정신과 교수는 작가들에게 “창조성이 증가하는 기간(창조적 시기creative period)을 경험한 적이 있느냐?”라고 물었는데 89퍼센트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작가들은 이 시기의 느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열정과 에너지, 자신감이 상승한다. 사고의 유창성이 증가하고 연상 속도도 빨라진다. 수면 욕구가 줄어서 잠을 덜 자도 피곤하지 않고 깨어 있는 시간이 늘고 기분이 고양된다.” 이런 변화는 조증 상태에서 관찰되는 심적 상태와 똑같다. 창조성이 커지는 시기의 경험과 조증 증상이 현상학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음악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다 
차이콥스키는 어린 시절 자신이 무척 좋아하던 프랑스인 여자 가정교사가 일을 그만두고 떠난 후부터 말수가 줄고 내향적으로 변했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잔병치레가 잦아 고통에 시달렸다. 14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가 콜레라로 사망했고 그 후부터 우울한 나날을 보냈으며, 만성 우울증으로 자살 충동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창작을 멈출 수 없는 시기가 그에게도 찾아왔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살던 누이동생 집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어린 조카 블라디미르 다비도프에게 사랑을 느끼는 자신을 탓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우울증에 빠졌으며, 후원자 메크 부인이 갑작스레 결별을 알리자 우울증이 재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창작에 매달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게을러지는 순간 우울증이 엄습한다. 자신이 싫어진다. 창작만이 나를 구해준다. 음악이 없다면 나는 미쳐버렸으리라.” 음악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이다.  
에드워드 엘가도 조울병 환자였다. 그러나 감정이 수시로 격변해도 아내 덕분에 음악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기분이 자주 변하는, 여덟 살 연하 남편 엘가를 그의 아내는 아들처럼 돌봤다. 가난한 평민 출신 엘가와 달리 그의 아내는 귀족 가문이었고 음악가를 꿈꿨지만 남편의 예술 활동을 돕기 위해 자신의 미래를 접었다. 아내가 철저히 보호했기 때문에 엘가의 조울병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는 아내를 위한 헌정곡이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엘가는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구스타프 말러의 초상 ⓒGosta Serlachius Fine Arts Foundation

4 L.파스테르나크가 그린 라흐마니노프 ⓒGTG

심리 치료사의 도움을 받다 
구스타프 말러는 장녀 마리아가 다섯 살에 성홍열에 걸려 죽은 뒤 우울증이 발생했고,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아내가 불륜을 일으켰을 때 또다시 우울증이 찾아왔다. 심리적 위기에서 그를 구해준 이는 정신과 의사 프로이트였다. 
라흐마니노프도 정신적 위기를 심리 치료로 극복했다. 19세에 작곡한 작품을 직접 연주하며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24세에 발표한 교향곡 1­번의 실패로 우울의 늪에 빠져 수년간 활동하지 못했다. 게다가 결혼 반대로 우울증은 더 깊어졌다. 그의 부모와 러시아 정교회가 약혼녀이던 사촌 나탈리아 사티나와의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때 라흐마니노프는 심리학자 니콜라이 달에게 상담을 받고 회복할 수 있었다. 대표작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그의 치료자인 니콜라이 달에게 헌정한 곡이다.  
어디 이들뿐일까. 브루크너·베를리오즈·도니체티·호로비츠 등도 조울병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위대한 음악가 중에 조울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이가 오히려 드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감정의 양극단을 조율하는 힘 
‘감정’을 뜻하는 영어 단어 이모션emotion의 라틴어 어원은 ‘움직이다’라는 뜻의 모베레movere다. 감정은 우리를 움직이는 에너지다. 마루야마 겐지의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 중 한 구절을 인용하면 “타인을 향한 한없는 친절함과 비정함을 동시에 지닌 채 그 양극단을 교류전류처럼 격렬하게 오가는 이”가 예술가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폭탄 같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자아를 통제하며 내면의 감정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의지를 가진 이가 바로 예술가다. 베토벤이 그랬다. 하지만 혼자 힘만으로 감정적 격동을 감당하지 못할 수 있다. 조울병은 결코 쉽게 통제될 수 있는 질환이 아니다. 의지로 이겨내기에는 벅차다. 사랑하는 이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엘가는 아내의 헌신으로 정서적 취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말러와 라흐마니노프는 심리 치료의 도움을 받았다. 
우울증과 조증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음악가들이 탁월한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정신적 문제가 오히려 창조성을 고양시켰기 때문이다. 겸상 적혈구 빈혈증은 아프리카계 인종에서 주로 나타나는 혈액 질환이다. 양쪽 부모에게서 낫 모양의 퇴행성 적혈구 유전자를 물려받으면 발병한다. 부모 한쪽에서 겸상 적혈구 유전자를 하나만 물려받으면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 유전자를 하나만 가진 사람은 아프리카에서 유행하는 말라리아에 대한 저항력을 갖는다. 생존에는 더 유리해진다. 어디 겸상 적혈구 유전자만 그럴까. 예술가에게 내재된 조울병이라는 광기도 마찬가지다. 
조울병은 공감 능력, 창조성 그리고 회복탄력성을 키워준다. 우울증을 겪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의 아픔에 더 깊이 공명할 수 있게 된다. 괴로움을 극복한 뒤에는 회복탄력성이 높아진다. 조증은 연상 작용을 활성화하고, 사고의 흐름을 빠르게 만들고, 생각의 유연성을 키워준다. 우울 상태에서 무의식이라는 깊은 우물에 들어가서 예술적 자양분을 섭취하고, 조증 상태에서 그것을 길어 올려 세상에 내놓는 일. 이것이 바로 창작의 요체가 아니겠는가. 조울병은 이렇게 예술가의 심혼과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이며, 그 사이를 흐르는 강력한 전류인 것이다.  

글 김병수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원장.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임상교수로 근무했다.‘당신이라는 안정제’ ‘이상한 나라의 심리학’ 등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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