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네비게이션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빠른예매 바로가기 사이트 지도 바로가기
월간미르 상세

2020년 01월호 Vol.360

상상의 열매, 앞서간 축제

안목의 성장 | 태국 원더프루트 페스티벌

다음 세대를 위한 앞날을 고민하는 축제, ‘원더프루트 페스티벌’. 김승민 큐레이터의 시선을 빌려 축제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본다. 

 

2016년 ‘제1회 직지코리아국제페스티벌’의 전시 기획을 맡았다. 그때 나는 영국의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설치 작가인 에이브 로저스에게 전시 디자인을 의뢰했다. 그와 함께 현지답사차 청주를 찾았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최초의 국제 페스티벌이란 야심 찬 포부와 비교해 전시 공간은 턱없이 협소했지만 누구보다 큐레이터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던 그였다. 긴밀한 협업 끝에 작은 공간에 직지의 창조 정신을 꾹꾹 눌러 담아 관객에게 아름답게 선보일 수 있었다. 에이브가 만들 원더프루트 페스티벌의 화려한 색채를 상상하며 태국 파타야로 향했다.

 

(왼) 원더프루트 페스티벌의 시작을 알리는 파이어 퍼포먼스.

(오) 공중에서 내려다본 폴리곤 공연장.

 

상상의 열매를 맺다
원더프루트 페스티벌Wonderfruit Festival은 2014년 시작해 2019년 6회째를 맞은 친환경 예술 축제다. 이번 2019년에는 12월 12~16일 태국 파타야 외곽에 자리한 시암 컨트리클럽에서 개최됐다. 태국 고유의 지역색을 강조해 연출한 11개의 공연장과 그 주변에 설치한 수많은 무대에서 뮤지컬·댄스·음악·공연·미술 설치·워크숍 등이 펼쳐졌다.
‘원더Wonder’와 ‘프루트Fruit’, 즉 원더프루트Wonderfruit는 ‘상상의 열매’라는 신조어다. 이 행사는 ‘아시아의 버닝맨’ 또는 ‘아시아의 코첼라’라고 불리면서 그 열매를 맺었다. ‘버닝맨’은 미국 네바다주 사막 한가운데서 각종 퍼포먼스를 펼치는 축제다. ‘코첼라밸리 뮤직&아츠 페스티벌’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인디오의 코첼라밸리에서 진행되는 록 페스티벌이다. 도대체 어떤 축제길래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제의 이름을 따 별명이 붙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원더프루트는 단순한 음악 페스티벌이 아니다. 이 페스티벌의 모토는 모든 사물을 아끼고 그 생명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지속가능성’이다. 세상을 바꾸는 창조적인 지성인들이 이를 느끼고 경험해 변화를 모색해 가는 플랫폼인 것이다.
원더프루트는 다양한 사람이 참여해 함께 만들어가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공개 모집으로 뽑힌 건축가들을 한 달 동안 태국에 초대해 작품을 설치할 기회를 제공하는 ‘원더프루트 파빌리온’이 대표적 사례다. 사회참여와 철학을 강조하는 문화의 ‘다보스포럼’ 같은 프로그램 ‘에소스ETHOS’ 포럼에서는 각기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40여 명의 인사가 축제가 열리기 전 초대돼, 소그룹으로 나뉘어 토론도 하고 발표를 한다.
2014년 원더프루트 페스티벌을 처음 기획한 프라니탄 피트 폰프라파는 상업에 물든 파타야의 이미지에서 탈피해 천혜의 자연이 일궈낸 정신과 문화를 강조한다. 그는 다각도의 시도 끝에 2018년부터 에이브 로저스와 손잡고, 작은 개울이나 텃밭을 지극히 태국적이면서도 문화를 초월한 공간 ‘더 필드(광장이라는 뜻)’로 꾸몄다. 피트는 종합 문화예술 장르인 축제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진 리더이고, 에이브 로저스는 기획자의 의도를 정확히 해독해 작품으로 표현하는 디자이너다. 그들의 긴밀한 소통을 통해 지금의 원더프루트 페스티벌의 무대와 공간이 탄생한 것. 또한 피트는 원더프루트 페스티벌을 기획하면서 버닝맨에서의 경험에서 체득한 철학을 차용했다. 모든 참가자는 개인 컵을 축제 기간 내내 사용하는데, 한 톨 쓰레기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규칙이 그 일례다.
단순히 3~4일간 떠들썩하게 놀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창의적인 사람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 앞날을 고민하는 축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뤄낼 변화의 모습은 아마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필자의 경우, 전시 기획을 할 때마다 가벽이나 조명처럼 한 번 사용하고 버려지는 수많은 전시 부대 용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그뿐만 아니다. 전자뮤직 뮤지션들이 직접 노래를 골라 2~3시간 동안 선보이는 방식으로, 세계 유수 뮤지션들의 라이브 디제잉 무대도 마련했다. 버닝맨과 이비자섬에서 열리는 여름 시즌 파티들, 한 집의 작은 창고에서 시작해 지금은 수억 명이 시청하는 온라인 비디오 플랫폼 ‘보일러 룸’을 살펴보면 그 안에 깊숙이 스며든 것이 전자음악이다. 마치 댄서, 안무가, 큐레이터, 디자이너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캔버스 위의 전시처럼 하우스, 딥하우스, 테크노 등 전자음악 뮤지션의 공연을 숲속이나 해변에서 즐기도록 큐레이션했다. 피트는 이번 원더프루트 페스티벌의 어떤 공간에 가든 끊이지 않고 들리는 전자음악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원더프루트에서 음악은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우리를 설레게 하고, 포근하게 안아주다가, 또 여행을 떠나는 듯 탐험케 하는 음악을 선정했죠. 저희는 틀에 박히고 유행을 타는 트렌디한 음악 대신 약간 특이하면서도 예상할 수 없는 음악들을 선호했고 앞으로도 이를 유지할 거예요.”

 

 

(왼) 폴리곤 공연장 무대에 선 비 스벤슨. 그는 전자음악의 쿠엔틴 타란티노라고 불리며 두터운 팬층을 거느리고 있는 덴마크 뮤지션이다.

(오) 수상 쉼터 배싱 하우스가 떠 있는 강가에서 각종 레저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

 

 

(왼) 에이브 로저스가 디자인한 ‘에코 빌리지’ 야외 공연장 관객석에 설치한 치앙마이 지방의 양산이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고 있다.

(오) 원더프루트에 참여한 사람들이 ‘태양의 무대’에서 에시드 파올리의 공연을 즐기며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입체적인 음향이 무대에 깃들다
최첨단 문화 스타트업 기업과의 컬래버레이션을 맛보는 것도 원더프루트의 묘미였다. 그중 폴리곤 라이브Polygon live는 다수 라이브 음악과 다른 신선한 감동을 안겨줬다. 음악이 지닌 고유의 감동을 한 차원 더 높이는 획기적인 기술을 접목했기 때문이다. 보통 공연장에는 스테레오 스피커를 무대 주위에 돌아가며 설치한다. 그런데 폴리곤 라이브에서는 야외무대를 중심으로 관람석 전체에 거대한 원형으로 스피커를 설치했다. 지상에서 약 3미터 높이에 설치한 두 줄의 프레임에 각종 음역별 고성능 스피커 20개를 5미터 간격으로 둔 것이다. 청자를 중심으로 마치 오케스트라가 360도 회전하면서, 사방에서 연주하는 듯한 신비로운 착각을 일으킨다. 첼로의 저음이 들리다가도, 이어서 바로 오른쪽에서 바이올린 현으로 켜는 비브라토의 섬세한 떨림이 얼굴의 솜털을 스치듯 흘러간다. 스타카토의 격렬한 피치음, 플루트의 바람결 소리, 발밑으로 전달되는 비트를 느끼면 온 세상이 온통 나를 중심으로 연주하는 것만 같다.
어떻게 음악을 ‘공간적’으로 프로그래밍하는지 스타트업 기업 ‘폴리곤’을 창립한 음악 및 테크놀로지 기업가 중 한 명인 아담 니콜라스에게 물었더니,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원더프루트 폴리곤 무대에 오를 예정인 뮤지션들은 미리 폴리곤 레코드 스튜디오에 와서 사운드 엔지니어들과 함께 몇 날 며칠을 작업한다고. 종류별로 음악을 분류한 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는 일반적인 스피커가 아니라 아래와 위로 소리가 360도 움직일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것. 즉 관객이 경험할 사운드 스케이프(소리의 ‘사운드’와 풍경의 ‘스케이프’를 합친 말)를 설계한다. 기획자인 필자도 관심이 가는 대목이었다. 최첨단 기술과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협업해서 관객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선물하는 것은 기획자에게 가장 큰 기쁨이니까.
폴리곤 극장을 이루는 골격은 놀랍게도 왼쪽 오른쪽이 아닌 공간에 적용한 3면체 음악이었다. 낮에는 대나무가 늘어뜨린 이파리가 바람과 협연해 자연의 음악을 빚어냈고, 해가 지고 열대의 밤이 찾아오면 레이저 광선과 천연 향이 또 다른 환상적인 빛을 내고 오감을 자극한다.

 

야자수와 농장 그리고 작은 숲에 둘러싸인 폴리곤 공연장의 해 질 녘 풍경.

 

자연 친화적인 축제를 디자인하다
축제의 공간에는 ‘지속가능성’을 지향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태국의 바닷가 마을에서 영감을 받아 대나무로 만든 양파 모양의 휴식 공간 ‘배싱 하우스Bathing House’가 멋스럽다. 물에 떠 있는 이 쉼터에서 낮잠을 자거나 수영할 수도 있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한 장면에 등장할 법한 체크무늬 쿠션으로 꾸민 글램핑 캠프, 작가가 만든 자연이나 새의 소리를 공간적으로 배치하는 소리 장치, 그림자 인형극을 설치한 소극장과 레이져쇼를 펼치는 작은 숲도 마련했다.
이번 축제의 공간 디자인을 총괄 디렉팅한 에이브 로저스는 “이번 축제의 공간과 무대를 만들 때 땅을 빚는 ‘랜드 스케이핑’의 개념에 충실했다”라고 말한다.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뜻을 지닌 크리에이처 빌리지는 하늘에서 보면 생물체 모양을 하고 있어요. 지형을 조각해서 눈과 귀와 손을 만들었고, 그 공간의 귀에는 음악 무대를, 손에는 손으로 만지는 프로그램을 펼쳐냈어요.”
에이브가 디자인한 원더프루트의 퍼포먼스 공간을 드론을 띄워 살펴보면 인간·휴식·자연에서 온 친환경적인 재료들이 환상적이고도 위트 있게 어우러져 있다. 대나무 시소와 흙 미끄럼틀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은 자연스레 이 공원의 마지막 부분에 다다르게 된다. ‘손’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폐플라스틱을 쉽게 재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프레셔스 플라스틱’의 연장 세트를 통해 친환경 생활에 대해 배운다.
야외무대 관람석에는 재활용 천으로 파라솔을 제작해 설치했다. 한낮의 강렬한 햇빛을 막아주는 그늘 아래서 야외 공연을 즐길 수 있다. ‘성찬의 극장’에서는 마치 원형극장을 상징하는 듯한 원탁이 있고, 그 가운데에서 요리를 할 수 있다. 이 거대한 식탁에는 한 번에 250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는데, 매일 밤 셰프가 제공하는 다양한 태국 요리가 원탁에 오른다. 이 모든 삶의 행동 자체가 퍼포먼스인 것이다.
축제가 열린 나흘 동안 아시아 즉 홍콩,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그리고 호주에서 온 약 2만 명의 방문객이 참가했다. 이번 축제의 목표인 ‘지속 가능한 창의적인 경험’을 체득한 여행자들이 가슴에 담은 감동은 앞으로 더 큰 변화와 창작의 씨앗을 틔울 것이다. 한국이 이번 원더프루트 페스티벌에서 발견한 지속 가능하고도 자연 친화적인 공간 연출과 접목해 좀 더 폭넓은 스펙트럼의 퍼포먼스를 펼친다면 세계적인 도약을 이룰 수 있으리라 전망한다. 나아가 나물 같은 약용식물을 요리한 음식, 참선과 음양오행을 이용한 의술, 천년의 도료라고 알려진 옻칠이나 조개의 자개와 같은 한국의 친환경적 요소에 예술적 인프라를 융합하면, 한국적이고도 국제적인 페스티벌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김승민 큐레이터. 2016 직지코리아페스티벌에서 핵심 주제를 다루는 전시회를 디렉팅했으며, 당시 전시 공간 디자인을 에이브 로저스에게 의뢰해 협업했다. 현재 영국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으며, 이스카이아트 큐레이션 전문 리서치 센터를 설립해 다양한 큐레이션을 펼친다.

 

사이트 지도

사이트 지도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