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니 어언 10년이 흘렀다.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개관 10주년을기념해 영국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을 짚어보고,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고민해본다.
데이비드 보위 전시 광경 ⓒV&A
10년 전, 공연예술박물관 개관을 준비하던 2009년을 떠올려본다. 비록 필자는 당시 박물관에 근무하지 않았지만, 전 국립극장장 신선희의 글을 기억한다. 그녀는 공연예술박물관을 통해 “지나간 예술로 앞으로의 예술을 빚어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일반 박물관과 달리 소장 자료를 단순 진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공간을 연출하는 극장적인 전시관이 돼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공연예술은 여러 가지 예술 요소가 하나로 집합된 종합예술이다. 공연예술 자료 역시 다채롭고 독특하다. 그러한 공연예술 자료를 소장하는 박물관이 특별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신선희 전 극장장은 비범함을 지닌, 살아 있는 공연예술박물관이 되기를 기대한 것은 아닐까. 영국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의 공연 및 퍼포먼스 아카이브Theatre and Performance archive는 살아 있는 공연예술박물관의 좋은 사례 중 하나다.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의 내부 ⓒpio3
박물관의 심장 ‘공연 및 퍼포먼스 아카이브’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은 영국 런던에 있는 세계 최대의 디자인 장식 예술 박물관이다. 세계 최초로 열린 만국박람회의 수익금과 전시품으로 1852년 사우스 켄싱턴 박물관이 창립됐고, 1899년 빅토리아 여왕이 현재 건물에 주춧돌을 놓아 그녀와 남편 앨버트 공의 이름을 따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됐다. 전 세계의 시대와 양식을 아우른 미술 공예품을 수집한다는 모토 아래, 약 500만 점에 이르는 다채로운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관람 코스의 길이만 해도 약 13km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이다. 현재 전시·교육·체험·공연·워크숍·강연·예술가와의 대화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이 소장한 수많은 컬렉션 중 공연 및 퍼포먼스 아카이브에는 20세기 영국의 주요 공연예술 작품이 모여 있다. 영국의 공연예술과 관련된 의상·소품·디자인·사진·악보·대본·프로그램·포스터 등이다. 본 아카이브는 1920년대에 설립됐는데, 개인 수집가 가브리엘 앤토벤이 대량의 극장 디자인 자료, 공연예술 관련 서적, 공연 사진 등의 수집품을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 기증했다. 그 이후로 점차 규모가 확장돼 별도 컬렉션으로 분리해 운영하게 됐다. 이후 공연단체·안무가·연출가·무대 디자이너 등으로부터 공연예술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헝가리의 음악가 벨러 버르토크의 발레 ‘허수아비 왕자’의 의상(1981), 로큰롤의 상징이자 롤링스톤스 하면 떠오르는 입술 로고 원작(1970) 등이 있다.
디자인 장식품 중심인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서 공연 및 퍼포먼스 아카이브가 차지하는 비율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박물관에 생명을 불어주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곳에 소장된 자료는 실연되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무형의 공연예술을 상기시킨다. 공연예술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연예술 속에는 철학·미학 요소들이 가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획한 다양한 형태의 박물관 프로그램은 관람객을 매료하기에 충분하다.
데이비드 보위의 알라딘 세인 앨범 커버
ⓒDuffy Archive
살아 있는 박물관? 살아 있는 박물관!
영국에 잠시 머물 당시 방문했던 공연 및 퍼포먼스 아카이브의 살아 있는 전시를 기억한다. 바로 데이비드 보위 아카이브 전시였다. 2013년에 개최됐지만 지금도 회자되는 전시 중 하나로, 당시 큰 이목을 끌었다. 그의 활동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도 인상 깊었지만, 미디어 아트를 적극 활용해 보여주는 데이비드 보위의 역동적인 모습과 음악은 지금도 생생하다. 박물관이 아닌 영화관이나 공연장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가히 ‘시공간을 연출하는 극장적인 전시관’이었다. 데이비드 보위의 사인이 새겨진 사진·엽서·티셔츠 등을 판매했는데 그의 인기는 지금도 여전해 보였다. 데이비드 보위는 비록 죽었지만 그의 숨결, 그의 예술혼은 그의 컬렉션을 통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서의 면모는 박물관의 내·외부에서 개최되는, 가히 축제에 가까운 다양한 프로그램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은 종종 영국과 문화 교류 관계를 맺은 국가들과 관련된 주제를 모티프로 삼아 전시를 개최한다. 러시아와 문화 교류의 해를 기념해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예술을 주제로 개최한 전시를 본 적이 있다. 러시아 문화예술은 러시아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는데,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평화와 상생을 추구하며 수많은 예술가들이 협업을 통해 작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협업이 필수인 공연예술이 앞장섰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예술의 독특한 특징이 작품과 관련 자료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영국에서도 러시아 공연예술은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어 무대 디자인 등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고, 박물관 곳곳에서는 러시아의 춤 배우기?전통의상 및 분장 체험?아방가르드 예술에 대한 강연과 토론 등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관람객들로 시끌벅적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 사는 것이 아닌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 아닌가.
올해에도 어김없이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는 춤과 음악이 가득하다. 박물관은 남아시아 무용단 아카데미Akademi의 아카이브를 소장하고 있는데, 올해는 그들의 춤을 직접 감상할 수 있다. 이 무용단은 영국을 중심으로 인도 춤사위를 전파했으며, 그 영향은 적지 않다. 40주년 되는 해에, 아카데미는 춤을 통해 동서양 융합의 메시지와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설립이사로 잘 알려진 타라 라지쿠마르에 대한 존경의 뜻을 전했다.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프로그램으로는 ‘디지털 시대의 무대 디자인’을 주제로 하는 포럼이다. 이 포럼은 미래의 무대 디자인 형태, 제작 방식 등을 디지털기술 융합이라는 키워드를 토대로 11월에 개최될 예정이다. 공연예술 분야 종사자라면 누구나 관심 있을 만한 주제다.
최근 국내 미술관이나 박물관계에서도 이와 같은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은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서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도전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제공하며, 융·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역사와 예술에 대한 체험의 주체가 눈에서 몸으로 확장된 것이다. 관람객들은 다채로운 프로그램 가운데 원하는 것을 선택해 각자만의 방식으로 콘텐츠를 체험한다.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10주년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위에 소개한 기관들에 못지않게 열심히 달려왔음을 알 수 있다. 기증과 이관을 통해 약 27만 점(2019년 10월 기준)에 해당하는 자료를 수집해 등록 후 정리하고, 지속적인 복원 및 디지털화 사업을 실시해왔다. 상설전시 운영과 9차례의 기획전시를 개최했고, 매년 크고 작은 전시연계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특히 체험 전시는 아이들에게 공연예술을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2019년, 공연예술박물관 건립 10주년을 맞이해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처럼 더욱 강력한 생명력을 가진 공연예술박물관으로 재탄생하는 전환점으로 삼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전통예술을 동시대적인 예술로 승화하는 국립극장의 공연예술박물관으로서 우리가 가진 장점을 극대화하고,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해야 한다. 다양한 형태의 프로그램이 박물관 내·외부에서 활발히 펼쳐진다면, 사람 냄새 나는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 거듭날 수 있다.
실험적인 주제와 새로운 디지털 기술의 적용은 공연예술박물관의 전시를 더욱 신선하게 할 것이다. 관람객은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전시연계 활동으로 공연예술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할 것이며, 체험 속 메시지는 관람객의 마음속 깊숙이 울림을 전할 것이다. 또한, 박물관 소장 자료의 전문DB를 보완하고, 출판이나 학술대회 개최 등을 통해 조사·연구 기능을 확대한다면 공연예술과 관련된 새로운 담론을 형성해 공연예술가들이 본 기관에 주목하는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 살아 있는 공론장의 역할도 기대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아낌없는 물리적 지원과 지지의 박수 없이는 불가능하다. 적극적인 노력을 지켜보고 기다려준다면 우리도 그 기대에 부흥해 강력한 생명력으로 살아 숨 쉬는 박물관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겠는가.
글 김도연 국립극장 자료 보존관리 담당. 런던대학교 아카이브·기록관리학 석사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기록학 박사를 수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