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네비게이션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빠른예매 바로가기 사이트 지도 바로가기
월간미르 상세

2019년 07월호 Vol.354

대사가 담긴 표정, 역사가 깃든 몸짓

전통 예술 기행┃인도의 전통 무용 '카타칼리'

지상에 남아 있는 낙원이라 불리는 인도의 케랄라주.

이곳에는 긴 서사시를 언어보다 몸동작에 집중해 전달하는 전통 무용이 있다.

 


 

내게 인도 여행은 사소한 긴장과 신경전의 연속이다. 도시 내에서 이동할 때 이용하는 교통수단 오토릭샤를 타는 순간도 그렇다. 대부분 내가 가려는 목적지를 말하면 다 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막상 출발해보면 반절가량의 기사는 길을 모른 채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고, 반절의 영악한 기사는 일부러 돌아간다. 후자라고 파악되면 화를 내야겠지만 전자인 경우는 난감하다. 지도를 보여주고 그쪽으로 가면 안 된다고 말해도, 아무렴 내가 기사인데 외국인인 당신보다 모르지 않다는 식이다. 이렇다 보니 택시를 탔다고 뒷자리에 편히 앉아 스쳐 지나가는 거리 풍경을 감상할 여유보다는 이 사람이 옳게 가는지 감시하며 도끼눈을 떠야 하는 시간이 더 길다. 결국 나는 택시의 승객이라는 생각보다는 이 기사를 도와 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는 게 더 중요해진다. 인도에 있다 보면 종종 택시의 승객이 아닌 기사의 조수가 돼 있는 경우가 많다. 꽤 난도 높은 주소지에 힘을 합쳐 도착했을 때의 그 기쁨이란!


그러나 이런 상황이 즐거운 건 여행 초기뿐이다. 여행이 중반에 접어들면 점차 체력이 바닥나고, 웃어넘길 일에도 짜증이 밀려온다. 남에게 짜증 내려고 길 떠나온 건 아니니, 서둘러 긴장의 끈을 놓고 쉴 만한 물가를 찾아가야 한다. 인도 남서부 해안의 케랄라는 바로 그렇게 지친 날 찾기 좋은 곳이다. 1999년, 세기말을 앞두고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케랄라주를 지상에 남아 있는 10곳의 낙원 중 한 곳으로 소개했다. 아라비아해의 멋진 풍경과 닐기리 구릉의 광활한 차밭의 아름다움도 한몫했지만, 잘 보존된 고유의 문화유산과 좋은 복지 정책도 선정 이유였다. 연방제 국가인 인도는 주마다 각각의 나라라 불러도 될 정도로 지역의 특색이 뚜렷한데, 그중에서도 으뜸은 케랄라다. 케랄라는 문화적으로 세 가지 고유한 유산을 인도에 남겼다. 바로 전통 의학 아유르베다, 전통 무술 칼라리 파야트, 그리고 인도 4대 무용 중 하나로 각광받는 카타칼리다.

 

대서사시를 이끄는 힘 있는 이야기극
케랄라의 카타칼리는 우리에게 마임과 흡사해 보인다. 산스크리트어로 카타는 이야기, 칼리는 행위란 뜻이다. 풀어서 해석하면 이야기극이다. 남성만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이 무용은 마치 일본의 가부키나 중국의 경극을 연상케 하는 과장된 얼굴 분장이 특징이다. 여기에 수십 킬로그램이나 되는 무거운 의상을 입어야 한다. 이야기는 배우의 표정·몸짓·손짓을 통해 전해지며 가수의 노래와 연주자의 반주가 가미된다. 내레이터 역할을 겸한 가수가 케랄라의 현지 언어인 말라얄람어로 된 노래를 통해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고, 배우가 하이라이트 장면을 마임으로 표현한다. 극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언어가 배제된다는 점이 꽤 흥미롭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이야기꾼이 될 소질이 다분한 인도인은 그들이 만든 모든 무용을 스토리텔링을 위한 도구로 만들었다. 인도 4대 무용인 카타칼리뿐 아니라 북인도의 전통 무용 카탁도 힌두교 신 크리슈나의 사랑 이야기를 연기와 몸짓으로 표현한 춤이고, 바라트나트얌은 신에게 드리는 찬송을 몸짓으로 재현한 춤이다. 특정한 이야기를 언어로 풀어내지 않고 몸동작으로 전하는 예술이 인도의 무용인 셈이다.

 

카타칼리의 뿌리는 불분명하다. 지금과 같은 형태는 17세기경에 완성됐다고 하지만, 카타칼리와 유사한 이야기극은 문헌상 2세기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왕과 귀족을 위한 문화였지만, 이내 민간에 퍼졌다. 인도는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이나 특이하게도 역사를 기술하지 않은 나라다. 종교적 감수성이 풍부한 인도인이 보기에 신의 1년은 인간의 360년에 해당했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는 건 바닷가 모래알의 수를 헤아리는 것처럼 의미 없다고 생각했고 인간의 역사 대신 신의 역사. 혹은 신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들이 상상한 신의 이야기, 신의 역사를 우리는 대서사시라고 한다.


인도의 2대 영웅 서사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는 카타칼리의 끊이지 않는 소재의 원천이다. 언젠가 ‘심청가’ 완창을 모두 들은 게 일생의 자랑인, 문화 애호가를 자처하는 지인의 부탁으로 10시간 분량의 카타칼리 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다. 공연이 끝난 후, 뿌듯한 표정을 한 그에게 이 내용이 고작 마하바라타의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대목이라고 말하자 그는 아연실색했다. 실제로 마하바라타는 그리스 문학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모두 합친 분량의 열 배쯤 된다. 그러니 전통 카타칼리 공연은 황혼에 시작해 일출 직전에 끝나는 게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제 인도인들도 3~5시간 정도의 공연 시간이면 클래식 카타칼리라고 부르곤 한다.

 

노력으로 지켜낸 전통의 미래
여행자들이 관람할 수 있는 카타칼리는 대략 한 시간 분량의 아주 축약된 버전이다. 모든 전통극이나 무용은 그 나라의 문화와 종교를 기반으로 하며 그 지역의 언어로 공연된다. 따라서 미처 공부하지 못하고 온 외국인 여행자에겐 대부분의 전통극은 이해하기 어렵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카타칼리는 그런 준비되지 않은 여행자에게도 큰 재미를 주는데, 공연 전 미리 공개되는 분장 시간 때문일지도 모른다. 카타칼리는 가부키나 경극보다 더 화려한 얼굴 분장이 특징이다. 배우들은 공연 한 시간 전쯤 무대에 앉아 분장을 시작한다. 모든 재료는 케랄라에서 나오는 천연 성분의 염료다. 녹색은 주인공의 색으로 비슈누 신을 상징하는데, 님(Neem)이라는 인도 전통 의학에 쓰이는 잎을 가루 내 쌀가루와 코코넛 오일에 섞어 염료를 만들고, 노란색은 우리가 모두 아는 강황, 흰색은 석회와 쌀가루를 섞어서 만든다. 일단 색을 잘 묘사할 수 있도록 캐릭터에 따라 배정된 기초화장을 한 후, 가느다란 브러시로 눈썹·아이라인·입술·수염 등을 그린다. 카타칼리에 여성 출연자는 없지만 여성 역할을 하는 남성 배우가 있는데, 손거울을 들고 여성스러운 아이라인을 그리는 배우의 모습이 꽤 묘하면서도 매력적이다.

 

분장이 끝나면 무대가 닫히고 의상을 입는 시간이 이어지는데, 이는 관객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요즘은 극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공연 시작 전 배우 한 명이 나와 카타칼리에서 통용되는 손동작과 얼굴 표정이 무얼 의미하는지 설명한다. 사실 관객의 호응은 이 대목에서 가장 좋다. 카타칼리의 절기인 얼굴의 반은 웃고, 반은 우는 장면을 연출하면 객석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온다.

 

공연이란 관객이 있어야 존재하고, 관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꽤 오랜 기간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중 하나였다. 이 시기 대다수의 배우가 각자 살길을 찾아 무대를 떠났다. 문화예술에서 20~30년의 단절은 한 세대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1990년대 사재를 털어, 자신의 집에 공연장을 만든 데반 박사는 두세 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노력을 시작으로 요즘은 꽤 많은 카타칼리 전문 공연장이 생겨나고 있다. 케랄라주의 주도 트리반드룸에서 만난 카타칼리 전승자 우다얀Udayan 씨의 말에 따르면, 카타칼리는 이야기가 깃든 문학, 강렬한 메이크업과 화려한 복장에서 비롯되는 회화, 음악과 연기 그리고 춤 이렇게 다섯 가지로 구성된다고 한다. 언젠가 ‘햄릿’을 카타칼리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그는 카타칼리야말로 인간이 즐길 수 있는 모든 유희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케랄라를 찾았을 땐 카타칼리 햄릿 공연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글·사진 전명윤 ‘환타’라고도 불린다. 24세 때 발을 헛디뎌 인도에 떨어진 후 지금까지 덕업일치의 삶을 살고 있다. 일곱 권의 여행안내서와 두 권의 에세이를 냈으며 현재 ‘시사인’에서 ‘소소한 아시아’를 격주로 연재하고 있다.

사이트 지도

사이트 지도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