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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7월호 Vol.354

민족의 역사와 자부심을 담다

세계무대┃몽골의 전통 축제 '나담'

세계 10대 축제로 손꼽히는 몽골의 전통 축제가 있다.

드넓은 초원에서 펼쳐지는 몽골의 오랜 역사와 문화가 궁금하다면 ‘나담’을 주목해보자.

 

몽골의 전통 축제 ‘나담’은 몽골어로 놀이 또는 경기를 뜻한다. 말 그대로 나담에서는 호로당 모리(Hurdan Mori, 말 경주)·소르 하르바(Sur Harvaa, 활쏘기)·부흐(Boh, 씨름)와 같은 세 가지 경기가 벌어진다. 이를 ‘에링 고르왕 나담(Eriin Gurvan Nadam)’(남자의 3종 경기)이라 한다. 현재는 씨름을 제외한 두 종목에 여자도 참가하므로 이 말은 틀린 말이지만 본래 남자들이 힘과 기예를 겨루는 놀이에서 시작됐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지금도 나담을 에링 고르왕 나담이라 한다.

 

 

몽골인의 삶과 문화를 담은 축제
나담은 몽골인의 삶과 생업 및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 말은 몽골인의 삶에 가장 밀착해 있는 가축이다. 몽골인에게 말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가 없다. 또한 말이 없이는 너른 초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사는 유목생활을 영위하기가 힘들다. 이 점은 천 년 전이나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오죽했으면 ‘말이 없는 몽골인은 날개 없는 독수리’라는 속담이 생겨났겠는가? 당연히 몽골인은 좋은 말에 대한 욕망도 남달랐고 자기 말에 대한 자랑도 대단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서로 자기 말이 잘 달린다고 우겨대는 두 사람 사이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말 경주가 시작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여부야 확인할 수 없지만, 이러한 정서 속에서 말 경주가 하나의 경기로 정착된 것만은 사실일지 모른다.

 

 

 

활 역시 전통시대 몽골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구다. 즉 활은 보조 생업인 사냥 도구이자 외적을 막고 대외원정을 승리로 이끈 가장 중요한 무기다. 흔히 “몽골인은 기마(騎馬)와 궁시(弓矢)로 세계를 제패했다”라고 한다. 말 그리고 활과 화살로 세계를 정복했다는 뜻이다. 과장이지만 활과 화살이 몽골 역사에서 어떤 기능을 했는지 증언해주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몽골 구전 설화에는 활을 잘 쏘는 명사수 이야기가 많다. 그중 돋보이는 것이 ‘에르히 메르겐’ 이야기다. 에르히 메르겐은 ‘엄지손가락에 힘이 있는 명사수’라는 뜻이다. 그는 보이는 것이면 무엇이든 맞히는 천하제일의 명사수였다. 심지어 하늘에 있는 해까지 맞혀 떨어뜨린 신궁이다. 명사수 이야기는 몽골족의 설화에도 등장한다. 몽골 역사서 ‘몽골비사(Mongol-un ni´ua toba´an)’ 첫 부분에는 칭기즈칸 조상의 계보가 나온다. 그 설화에 따르면 최초의 몽골인은 하늘이 점지한 푸른 이리와 암사슴 사이에서 태어난 ‘바타치칸’이라는 사람이다. ‘코리차르 메르겐’ ‘보르지기다이 메르겐’ ‘도본 메르겐’ 등 그의 후손들 이름엔 줄줄이 ‘명사수’란 뜻의 ‘메르겐(Mergen)’이 붙는다. 이는 몽골인의 삶 속에서 활이 차지하는 비중을 말해준다. 몽골 그림 속의 전사들은 언제나 말을 타고 활과 화살통을 어깨에 메고 있다. 사냥 갈 때도, 싸우러 갈 때도 그 모양새다. 그중 출중한 사람은 메르겐으로 불렸고, 그는 선(善)의 상징으로 인식됐다. 활쏘기 대회는 메르겐이 되기 위한 다툼이다. 이것이 오늘날 나담의 한 종목으로 정착됐다.

 

씨름은 전통적으로 에링 고르왕 나담의 정수이자 남자의 힘과 능력, 위세를 만인에게 과시하는 경기로 여겨졌다. 말 경주와 활쏘기는 거를 수 있어도 어느 나담에서든 씨름만은 반드시 열린다. 축제에서 씨름 경기가 맨 먼저 열리는 것도 씨름이 갖는 중요성 때문이다. 몽골의 거친 대지와 혹독한 자연환경은 그 자체로 커다란 시련이다. 강인한 정신력과 힘이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한 사냥과 전쟁에서도 무엇보다도 강한 체력이 요구됐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씨름 경기를 벌여 갈고닦은 실력을 겨루고 시합했다. 몽골 서사시에는 “수낙타 가죽으로 만든 조닥(씨름복 상의), 수소 가죽으로 만든 쇼닥(씨름복 하의)”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는 수낙타와 수소의 힘이 자신에게 전이되기를 바라는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런 점에서 씨름 역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힘을 기르고 기술을 연마하는 과정에서 현재와 같이 놀이 문화로 정착됐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나담은 몽골인들의 삶의 과정이 여과 없이 반영된 놀이 문화다. 그런 이유로 나담에서 벌어지는 경기와 거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행위 속에는 몽골인의 민속과 신앙 의식이 응축돼 있다. 옛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선과 악의 싸움도 마지막에는 이 3종 경기 또는 그중 어느 하나를 통해 해결한다. 예컨대 몽골 옛이야기에서는 하늘로 올라가 북두칠성이 된 착한 형제들이 샤즈가이 칸(까치대왕)이라는 사악한 왕의 부하들과 대결할 때도 활쏘기와 씨름으로 승부를 내고, 또 다른 북두칠성 이야기에 나오는 알하이 메르겐과 고낭 사르 형제가 망가스 대왕이라는 악마와 싸울 때도 3종 경기가 등장한다. 이런 점에서 나담은 몽골 유목민들이 이룩한 물질·정신문화의 종합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또 이것이 지금까지 몽골인의 가장 큰 축제로 계승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민족의 뿌리를 잇는 축제
몽골인은 어디에 있든 나담을 기억하고 여름이 오면 어떤 식으로든 이를 즐긴다. 몽골(속칭 외몽골)은 물론 중국의 네이멍구자치구(속칭 내몽골)와 바이칼호 동남쪽 러시아 연방에 속하는 부랴트 등 몽골족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나담이 열린다. 외국에 있는 사람도 나담을 지내기 위해 귀국하고 도시에 사는 자식들은 축제 시기에 맞추어 고향을 찾는다. 심지어 외국에서도 축제를 즐긴다. 한국에서 머무는 몽골족(2018년 말 기준, 약 4만 6천 명)도 해마다 나담을 즐기고, 베이징에 거주하는 몽골족 역시 2년에 한 번씩 나담을 개최한다. 이들은 축제를 통해 보고픈 고향 산천을 생각하고, 현대 문명의 그림자에 억눌려 사라져가는 옛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나담은 여름철에 열린다. 몽골국의 경우 7월 11~13일 전국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물론 같은 몽골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다른 시기에 열리는 경우도 있다. 이 축제는 명절보다 더 북적이고 활력이 넘친다. 차강 사르(우리의 ‘설’과 같은 몽골 명절)가 비교적 정적이라면 나담은 동적이다. 무엇보다 기후가 좋아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겨울이 길고 추운 몽골에서 6~8월은 그야말로 황금 계절이다. 햇볕은 뜨겁지만 그늘에 들어서면 금방 서늘해진다. 또한 여름은 대자연의 선물인 유제품이 풍부한 계절이다. 그래서 유목민은 유목민대로 행복하고 도시민은 도시민대로 행복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겨우내 외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유목민 게르에 낯선 관광객이 찾아오는 것도 여름이다. 이래저래 행복한 시기인 7월 중순에 나담이 열린다.


나담은 오랜 역사 과정에서 변화 발전해 현재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3종 경기가 벌어지는 에링 고르왕 나담은 물론이고 여자까지 참여하는 현재의 나담도 역사의 산물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몽골에 최초로 국가를 세운 흉노에 관한 기록이 많다. 그중에는 흉노의 제천 행사에 관한 것도 있다. 그중 “가을이 되어 말이 살찌면 나무를 돌며 제사를 지내고 사람과 가축을 헤아렸으며, 정월·5월·9월 무일에 하늘에 제사 지내고 국사를 논의한 후 말 경주와 낙타 경주를 즐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후자의 말 경주는 오늘날 나담 종목의 하나다. 몽골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나담의 기원을 흉노의 제천 행사 후 거행된 제전에서 찾고 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흉노 이후 거의 모든 유목민 사이에서도 확인된다. 흉노에 이어 몽골 초원을 지배한 선비를 비롯해 돌궐이나 거란도 제사나 황자 출생·황후 책봉·황제의 생일 등 경축일에 활쏘기나 말달리기 또는 씨름을 즐겼다. 이러한 전통은 1206년 몽골 초원을 통합하고 몽골제국을 창건한 몽골족까지 이어진다.


이른바 ‘칭기즈칸 비석’이라는 석각 비문이 이를 말해준다. 현재 가장 오래된 몽골 자료로 알려진 이 비석에는 “칭기즈칸이 사르타굴 백성을 항복시키고 부카-소치가이에 모든 몽골 왕공王公들이 모였을 때 에숭게가 335알다(약 536미터)를 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르타굴은 중앙아시아의 호레즘으로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부근이다. 따라서 비문은 칭기즈칸이 호레즘 원정(1219~1225년)을 끝내고 열린 활쏘기 대회에서 에숭게가 약 536미터를 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몽골 연구자들은 이를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대규모 나담으로 보고 있다. 전쟁을 끝내고 이를 기념해 나담이 열렸는데, 활쏘기 대회에서 에숭게가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자료가 없어서 이때 다른 경기가 열렸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나담은 기본적으로 흉노에서 몽골제국에 이르는 이러한 놀이 문화 전통을 계승한 축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나담 축제가 7월로 고정되고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21년 혁명 이후다. 특히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바뀐 1990년대 이후, 혁명적 색채를 벗고 민주화된 사회에서 몽골인을 하나로 묶고 전통을 확인하는 순수 국민 축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진이 군사 퍼레이드를 대신하고 칭기즈칸의 ‘톡 술데’(군기)가 세워진 것도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몽골의 나담은 전 세계 몽골족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상징적 축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평래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한국의 대표적인 몽골사 연구자로 몽골의 신화와 종교 등 몽골의 정신문화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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