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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5월호 Vol.352

슬픈 역사를 희망찬 미래로 잇는 대서사시의 탄생

VIEW┃리뷰1 국립국악관현악단 관현악시리즈III '양방언과 국립국악관현악단-Into The Light'

양방언의 첫 국악 관현악곡은 웅장한 서사를 품은 영화 음악처럼 들렸다.

그와 함께 덜컹대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오른 관객은 뜨겁게 호응했고,

또 다른 각도로 대중에게 한발 더 다가가겠다는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2019년 3월 21일 | 롯데콘서트홀


‘국악 관현악곡 중에 너무 좋아서 수백 번 듣고 싶은 곡이 있는가.’ 몇 년 전 만난 한 국악 지휘자가 스스로 늘 던지는 질문이라고 했다. 베토벤 교향곡을 하루 종일 듣고 싶은 것처럼, 아름답고 감동적인 국악 관현악곡을 들려주기 위해서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얘기였다.


국악 관현악의 역사는 사실 길지 않다. 1965년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창단을 시작으로 본다. 그야말로 베토벤 교향곡 같은 서양음악에 대한 로망, 서구 오케스트라에 대한 동경에 뿌리를 두고 국악기로 서양 오케스트라를 모방해 탄생했다. 1985년 KBS 국악관현악단과 1995년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면서 르네상스를 맞았지만, 작곡가와 작곡 기법의 부족 탓에 늘 레퍼토리 빈곤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대규모 관현악곡이 하루아침에 탄생할 수 없기에 작곡가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의 필요성은 국악계의 오랜 화두였다.


50여 년의 역사가 흘렀어도 국민적으로 사랑받는 국악 관현악곡을 꼽기 힘든 지금, 새로운 모멘텀이 절실한 시점이다. 애초에 국악 관현악이 국악의 대중화·현대화를 위해 만들어진 새로운 형식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양방언을 택한 건 영리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양방언이 누군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공식 주제곡으로 온 국민의 가슴을 뛰게 했던 ‘프런티어(Frontier!)’의 작곡가다. 원래 아름다운 멜로디의 피아노곡이었지만 태평소·타악기 등 국악기를 적재적소에 활용해 국악의 매력을 새삼 환기한 ‘프런티어’뿐만 아니라 ‘Prince of Jeju’ 등 양방언의 다른 대표 곡들도 국악 관현악곡으로 편곡돼 다양한 장에서 울려 퍼졌다.


양방언은 국립국악관현악단과도 인연이 깊다. 국립극장의 여름 축제 ‘여우樂(락)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을 3년 동안 지내며 장르와 국경을 초월한 뮤지션들을 다양하게 섭외해 우리 음악계에 참신한 협업 모델을 선보였고, ‘여우락 페스티벌’ ‘제야음악회’ ‘정오의 음악회’ 등에서 국립국악관현악단과의 케미도 여러 차례 시험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그간 전통음악을 소재로 다양한 음악 실험을 시도하며 ‘리컴포즈’ 시리즈와 한 작곡가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작곡가 시리즈’, 상주 작곡가와 긴 호흡으로 작업하는 상주작곡가 제도 등을 통해 국악 관현악의 레퍼토리를 다각도로 구축해왔다. ‘양방언과 국립국악관현악단-Into The Light’는 또 다른 각도로 대중에게 한발 더 접근하는 시도다.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을 기반으로 대중적이고 감동적인 음악을 만들어온 양방언과 함께 ‘국악 관현악의 신세계’를 열겠다는 포부로 볼 수 있다.

 

 


대중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 양방언은 전 세계인의 가슴을 적시기 위해, 우리 민요 ‘아리랑’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물론 그 자신이 아리랑의 열성 팬이기도 하다. 이미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아리랑을 교향곡으로 선보였고, 2013년 대통령 취임식과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식 등에서 웅장한 규모로 편곡한 아리랑을 들려준 바 있다.


이번엔 ‘고려인’의 아리랑이라는 점이 달랐다. 마침 KBS 1TV의 3.1운동 10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아리랑 로드’의 음악을 맡아 고려인 동포들의 강제 이주 여정을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롭스크·바이칼호·카자흐스탄 바슈토베까지 훑고 온 것이 계기가 됐다. 고려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레퀴엠의 단조 선율에 아리랑을 입혀 교향곡 ‘아리랑 로드-디아스포라’의 메인 테마를 만든 것이다.


마치 고려인의 강제 이주를 그린 장엄한 영화 한 편을 본 듯하달까.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 소외되고 우리 기억 속에 잊혀가고 있는 고려인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대서사시였다. 구한말 연해주로 건너간 고려인들이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며 참혹한 고통을 겪고, 그 후로도 오랜 고난의 세월을 보내면서 죽어서 혼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했던 간절한 마음을 음악에 고스란히 담은 것이다.

 

거대한 역사 그린 영화 음악처럼 장엄한 울림
‘아리랑’은 ‘아리랑 로드-디아스포라’의 일곱 개 악장을 하나로 이어주는 연결 고리로 작용했다. 타의에 의해 강제로 터전을 버리고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황량한 심정을 그리는 1·2악장부터 ‘아리랑’ 모티프가 은근히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금과 타악기로 기적 소리 등 벌판을 덜컹거리며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생생히 묘사한 3악장을 거쳐 4악장에선 소금 솔로로 시작해 본격적인 아리랑 변주곡의 향연이 펼쳐진다. 시종 어둡지 않고 밝은 분위기는 고난 속에서도 삶과 희망이 있음을 노래하고 있었다.


과감히 성악을 도입한 5악장은 클라이맥스라 할 만했다. 카자흐스탄에서 곡조는 사라지고 가사만 남은 두 개의 아리랑, ‘연어 아리랑’과 ‘빠뜨라크아리랑이’에 곡을 붙여 국립국악관현악단 악장 안수련과 문형희의 솔로를 시작으로 모든 연주자가 노래까지 부르는 모습은 뜻밖의 감동으로 다가왔다. 마치 ‘아리랑’은 수많은 한국인이 불러서 만들어진 노래이며, ‘국악 관현악’이란 음악도 많은 사람의 마음에 닿아야 한다고 웅변하는 듯했다.


이어진 6악장과 7악장은 똑같은 아리랑 모티프라도 큰 산 하나를 넘은 것 같은 후련한 느낌을 줬다. 어둡고 아픈 역사를 극복하고 이제는 힘 있게 전진해야 할 때라는 듯, 모든 악기가 화성으로 어우러지며 조화롭고 풍부한 음향을 만들어냈다. 7악장의 마지막, 기운찬 태평소 솔로와 함께 속도가 빨라지는 엔딩은 마치 춤을 추며 찬란한 빛 속으로 나아가는 듯 희망찬 서사를 완성했다. 재일 동포 2세로 ‘디아스포라(Diaspora)’ 그 자체인 양방언에게 아리랑은 더는 슬픔이 아니다. 구슬픈 아리랑도 미래 지향적인 양방언을 거쳐 치유와 희망으로 승화된 것이다.


단순히 애국심이나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서사에 기댄 감성적 성취만은 아니다. 대중의 귀에 친숙한 민요 선율을 활용했지만 세련되고 품위를 갖춘 관현악곡으로서의 음악적인 성취도 있었다. 무엇보다 모든 악기를 주인공 삼았다는 점이 돋보였다. 국악 관현악에서는 흔히 악기나 악기군 사이의 음향 불균형 탓에 전체적인 소리 밸런스가 무너진다는 문제가 지적되곤 한다. 음량이 작은 악기는 분명 합주하고 있으나 소리가 묻혀버리는 경우도 흔하다. 세계의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들과 협업하는 무대에 익숙한 양방언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악기군 하나하나를 부각하며 모든 악기를 띄워줬고, 자칫 묻히기 쉬운 해금·대금·소금 등을 전진 배치해 각 악기의 존재감을 충분히 어필했다.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태평소 소리를 좋아한다던 그답게 ‘프런티어’에 이어 이번에도 태평소의 힘찬 기상으로 합주 전체를 이끌어갔음은 물론이다.

 

경계가 없는 곳에 ‘양방언다움’이 있다

2부는 양방언의 대표 레퍼토리를 새롭게 편곡해 구성한 무대였다. 1부에서 슬픔과 극복의 아리랑 교향곡을 들려준 뒤 일본인 기타리스트의 솔로로 2부의 문을 연 것부터 흥미로웠다. 스페인에서 정통 플라멩코를 공부하고 아시아 민요와 접목해 주목받고 있는 기타리스트 오키 진(沖仁)의 ‘금지된 장난’에 이어 양방언의 피아노와 소금, 장구 등이 가세해 아무런 제약도 없는 자유로운 편곡의 ‘아리랑’을 선보였다. 관현악이라는 틀에 매여 있던 1부와는 사뭇 다른, 날아갈 듯 가볍고 자유로운 아리랑에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질곡의 역사를 헤치고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21세기적인 아리랑’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중국 얼후의 대가 지아 펭 팡(Jia Peng Fang)도 등장했다. 양방언의 피아노와 지아 펭 팡의 얼후가 대금·생황과 호흡을 맞춘 ‘야상월우’, 관현악단과 협연한 ‘바람의 약속’ 등은 서양 악기와 동아시아 악기, 그리고 국악기가 모두 어우러지는 ‘월드뮤직’ 그 자체였다. 이어진 양방언의 대표곡 ‘Kitty’s First step’ ‘Black Pearl’ ‘Flower of K’, 앙코르곡으로 연주된 ‘프런티어’까지, 전 출연진이 월드뮤직과 국악 관현악의 협업으로 동서양의 음색이 어우러진 ‘양방언다운’ 앙상블을 이루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편곡자로 참여한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예술감독 계성원은 ‘아리랑 로드-디아스포라’를 “국악 관현악으로 어떻게 양방언다움을 펼쳐낼까 고민한 작업이었다”라고 말했다. ‘양방언다움’이란 뭘까. 경계인 양방언은 언제나 ‘노 바운더리(No Boundary)’ ‘경계 없음’을 추구해왔다. 그가 첫 국악 관현악 작업에 ‘고려인의 아리랑’을 굳이 선택한 것도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토해내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런 면에서 ‘아리랑 로드-디아스포라’는 공연의 2부에서 비로소 완성된 느낌이었다. 내용 면에서나 형식 면에서나, 경계가 없는 곳에 진짜 양방언이 있었다.


유주현 ‘중앙SUNDAY’공연 담당 기자.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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