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들의 성지이자 셰익스피어의 흔적을 찾기 위해 전 세계 관광객이 방문하는 명소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
이 극장에 얽힌 오래된 이야기를 들어본다.
1598년 12월 템스강이 얼어붙을 정도로 몹시도 춥던 밤, 더 시어터(The Theatre)의 굳게 닫힌 문 앞에 드리운 그림자 아래로 배우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장검?단검?창?도끼 등의 무기로 무장한 채였다. 배우들은 주변에 망을 봐줄 감시자들을 배치하고 열두어 명의 일꾼과 함께 더 시어터의 건물을 통째로 해체하기 시작했다. 새벽빛이 밝아올 때쯤, 목재를 실은 배가 유유히 템스강을 건너 로즈 시어터(Rose Theatre)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도착했다. 소식을 듣고 집에서 뛰쳐나온 땅 주인 자일스 앨런(Giles Allen)은 이 황당한 상황에 거의 졸도할 지경이었다. 사유지 무단 침입의 근거로 그들을 고발했으나 사태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계약 조건상 앨런의 땅 위에 지은 극장 건물은 장기임차 계약자 제임스 버비지(James Burbage)에게 소유권이 있기 때문이었다.
야반도주로 돈뭉치를 챙기는 경우는 있어도 극장을 뜯어서 옮기는 일은 아마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연극사에 길이 기록될 역사적인 사건이 런던 브리지를 가로질러 일어났다. 1598년 겨울부터 1599년 봄 무렵까지, 더 시어터의 목재가 런던 브리지를 건넜고 템스강 남쪽 서더크에 새로운 극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Shakespeare’s Globe)(이하 글로브)의 시작이다.
템스강을 오른편에 두고 뱅크사이드를 따라 걸으면 지금은 뉴 글로브 워크(New Globe Walk)라고 새롭게 이름 붙여진 길이 있다. 이곳에 미국의 영화배우 겸 영화감독 샘 와너 메이커(Sam Wanamaker)와 국제 셰익스피어 글로브 센터가 주도해 재건축한 지금의 글로브가 있다. 1997년에 재개장한 이곳은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때의 극장을 재현한 것이 특징이다.
영국 연극사를 대변하는 글로브는 400년이 넘는 긴 역사 동안 부침을 거듭하며 지금에 이른다. 영국의 첫 번째 공공극장인 더 시어터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던 제임스 버비지는 임대차 계약이 끝나던 해인 1597년, 갑자기 죽음을 맞는다. 극장은 그의 두 아들 리처드와 커스버트에게 상속되지만, 예정보다 오래 끌어온 계약이 못마땅했던 땅 주인 앨런은 재계약을 거절했다. 결국 극장은 문을 닫게 된다. 그리고 앞에서 얘기했듯이 한밤중에 극장을 뜯어 강 너머로 통째로 옮긴다.
새로운 극장의 31년 임차 운영권 중 절반은 젊은 버비지 형제가,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5명의 배우가 나누어 가졌는데 셰익스피어도 이 중 한 명이었다. 이 새로운 시작을 위해 극장의 주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배우는 온 세계를 연기한다(Totus mundus agit histrionem)’라는 의미의 라틴어로 야심만만하게 극장의 표어를 만들고 헤라클레스가 어깨 위에 지구 전체를 올리고 버티는 형상을 심벌로 만들었다. 그리고 글로브 극장이라고 칭하며 셰익스피어 작품 중 대부분이 바로 이곳에서 초연됐다.
1599년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완공된 글로브가 문을 열었다. 각 면의 너비가 약 30미터 되는 목조 건물의 무대는 계단식으로 된 관람석 세 구역과 그라운드라고 불리는 지면의 입석 구역을 향해 돌출되도록 만들어졌다. 총 3천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는데 이는 당시 대도시 런던에서도 놀라운 크기였다. 물론 입석 관람객도 포함된 숫자지만, 우리나라의 세종문화회관이 3천여 석이니 비교가 될까. 1997년에 재건축한 글로브는 원래의 크기와 비교하면 3분의 1도 안 되는 857석 규모다. 개막작은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였다. 첫 작품인 만큼 가볍고 대중 친화적인 작품을 선보일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과는 다른 선택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왕 암살 시도, 그리고 사회에 만연하게 퍼져 있던 강한 불안감을 반영한 적절한 비극이었다. ‘줄리어스 시저’를 시작으로 글로브는 연이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극장이 문을 연 지 14년이 지난 어느 날, ‘헨리 8세’ 공연 도중 발생한 화재가 목조 건물을 삼켜버렸다. 첫 번째 글로브가 이렇게 사라졌다. 이듬해인 1614년 같은 자리에 두 번째 글로브가 다시 세워졌다. 이번에는 사고 없이 1640년까지 운영됐다. 이후 글로브는 1642년 청교도 정권의 압력으로 폐쇄되고 1644년 다시 철거되는 운명을 맞는다. 그리고 1997년 6월 말, 극장이 있던 원래의 곳에서 2백여 미터 떨어진 위치에 지금의 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여전히 셰익스피어를 만나다
연극인들의 성지이자 셰익스피어의 흔적을 찾기 위해 전 세계 관광객이 방문하는 명소, 글로브에 가면 언제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16세기 당시 분위기로 즐길 수 있다. 특히 올해는 글로브의 역사에서 중요한 두 명의 인물을 기념할 만한 해다. 오리지널 글로브 극장의 경영자이자 배우인 리처드 버비지의 사후 400주기이며 현재의 글로브 건립에 앞장선 미국 배우 샘 와너메이커가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리처드 버비지는 셰익스피어와 함께 극장을 운영하면서 1619년에 생을 다할 때까지 무대를 지킨 진정한 배우였다. 당연히 셰익스피어 주요 작품의 주인공을 맡아 무대에 섰는데, 연극 역사상 최초의 햄릿이 바로 리처드다. 셰익스피어와 그는 동업자이자 친구로 평생을 함께 보냈고, 셰익스피어는 세상을 떠날 때 존경과 우정을 담아 리처드에게 반지를 유산으로 남겼다.
하지만 만약 샘이 없었다면 셰익스피어와 리처드의 노력은 템스강의 모래에 덮여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샘의 불굴의 노력 덕분에 글로브는 다시 모습을 되찾았다. 안타깝게도 그가 새로운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의 개관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업적을 기려 ‘샘 와너메이커 플레이하우스’를 2014년에 개관했다. 이 두 사람의 생과 업적에 대한 강연회가 3월 9일 열린다.
또한 글로브는 영국의 격변하는 사회를 셰익스피어 사극을 통해 통찰력 있는 안목으로 바라보자는 의미에서 특별 기획을 선보인다. 그 일환으로 2월부터 10월까지 약 9개월에 걸쳐 ‘리처드 2세’ ‘리처드 3세’ ‘헨리 4세’ ‘헨리 5세’가 샘 와너메이커 플레이하우스와 글로브 무대에 오른다. 이는 브렉시트 합의안에 대한 투표가 부결돼 진통을 겪고 있고, 영국 내에 거주 중인 유럽연합(EU) 회원국의 주민 등록 절차가 시작되면 제2의 윈드러시 스캔들 사태가 초래될까 우려되는 상황에서 단합된 영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미래를 바라보자는 외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생일을 맞는 4월에는 다양한 부대 행사가 펼쳐지는데 이 중 ‘애비에서의 셰익스피어(Shakespeare Within the Abbey)’(4월 25~27일)가 기대를 모은다. 관객은 웨스트 민스터 대성당 내부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네트를 따라 걷다 보면 신도석에서 기도하는 가난한 커플을 연기하는 배우와 중세 갑옷으로 무장한 배우들을 회랑에서 만나게 된다. 책 속에 갇혀 있던 셰익스피어의 시와 연극의 한 장면이 살아 숨 쉬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글로브까지 왔는데 공연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미 매표소 앞이 표를 구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면, 행여 좋은 좌석을 구하지 못할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면, 여느 극장과는 다른 글로브만의 티켓 구매 팁에 주목하자. 보통 30~45파운드나 되는 비싼 객석에 앉는 대신 ‘입석 구경꾼’이 돼보는 거다. 단돈 5파운드면 록 콘서트의 스탠드석과 같은 ‘야드 티켓’을 구매할 수 있다. 원형 무대를 둥글게 둘러싼 3층으로 나누어진 객석에 앉는 대신 무대 바로 앞 야드에 서서 구경하는 것이 어쩌면 더 매력적일지도. 공연 내내 서 있어야 하는 수고 따위는 금세 잊힐 것이다. 16세기 런던 시민들처럼 어깨를 비비고, 무대에서 야드로 뛰어드는 배우들과 함께 발을 구르며 환호하는 것이 바로 글로브의 제대로 된 연극 관람법이니 말이다.
글 최여정 런던의 오래된 뒷골목에 남겨진 셰익스피어의 흔적을 따라 ‘셰익스피어처럼 걸었다’를 썼다. 지금도 극작가들의 삶과 작품을 찾아 여행하며 희곡을 읽고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