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헬륨가스를 마시고 희한한 소리를 내며 등장해 엄청난 에너지로 군무를 췄다. 객석엔 시종 웃음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지난해 11월 ‘가무악칠채’ 무대에서 이요음이 보여준 것은 ‘리진’과 ‘춘상’의 그 고운 자태에서는 예상할 수 없는, 예사롭지 않은 포스였다.
1월 말 만난 이요음은 그간 좀 아팠다고 했다. ‘다음 날 공연이 걱정될 정도로’ 한 회 한 회 모든 걸 쏟아낸 ‘가무악칠채’를 끝내고 표창처럼 허리와 발목 부상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없어 보였다.
“재미가 훨씬 컸어요. 기진맥진할 정도가 되니 뭔가 했다는 성취감도 더 컸고요. 아무리 힘들어도 다시 무대에 오르도록 만드는 게 객석의 함성이란 생각이 들었죠. 관객의 그런 반응은 처음이었거든요.”
‘가무악칠채’는 국립무용단이 지난해 봄 출범한 안무가 육성 프로젝트 ‘넥스트 스텝I’ 중 한 편의 소품으로 시작됐다. 당시 다른 단원이 만든 소품에 참여했던 이요음은 이 무대를 뒤에서 지켜봐야 했지만, ‘가무악칠채’가 이번 시즌 국립무용단의 정식 레퍼토리 공연으로 선정돼 확장판으로 제작되면서 합류하게 됐다.
“헬륨가스를 마신 건 안무가(국립무용단원 이재화)의 아이디어였어요. 초연 때 제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좀 색다르게 등장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딱히 웃음 코드를 만들려고 한 건 아니지만 놀이처럼 즐기다 보니 재밌게 나온 것 같아요. 당시 객석에서 지켜보면서 저 무대에 같이 서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상상했었는데, 바로 옆에서 라이브 음악까지 터져주니 없던 흥도 나더라고요. 무용수들끼리 워낙 친해서 연습 때부터 장난도 많이 치고 편한 분위기에서 서로 눈빛 교환하면서 즐겁게 작업했죠.”
2014년 입단해 올해로 6년차인 이요음은 아직도 국립무용단에서 하는 모든 것이 즐겁고 좋기만 하단다.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매일 아침 몸을 풀 때부터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진심이 물씬 묻어난다. “가끔 몸이 힘들 때는 있지만 출근하며 항상 초심을 다잡아요.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는 게 진짜 행복한 거잖아요. 그런 마음을 늘 잊지 않으려고 해요.”
처음부터 늘 신나는 작업만 있었던 건 아니다. 입단하자마자 한국무용의 현대화를 위해 과감하게 시도했던 다소 난해한 무대를 만나기도 했지만, 그조차 다양한 공연을 경험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처음엔 어려웠던 게 사실이에요.(웃음)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움직임이라 적응이 쉽진 않았죠. 그런데 하다 보니 낯선 것들이 자연스레 연결되는 게 신기하고 그 나름대로 재미있었어요.”
2016년 ‘Soul, 해바라기’ 무대에 섰을 때의 감격은 잊을 수 없다. 국립무용단에 꿈을 품기 시작한 무대였기 때문이다.
“대학교 졸업반 때 ‘Soul, 해바라기’ 공연을 보고 놀랐어요. 무용수들의 에너지가 너무 좋았거든요. 무용수를 한 명 한 명 보는 재미에 공연 내내 무척 상기돼 있었어요. 좋은 작품을 보면 나도 저기 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런 걸 진짜 많이 느낀 공연이에요. 입단하고 나서 드디어 ‘Soul, 해바라기’를 하게 됐고 첫 공연 때 첼로 라이브 연주가 시작되면서 포즈 잡고 선 순간 울컥했어요. 바로 옆에 김미애 선생님이 계시는데, 5년 전 객석에서 바라보던 순간과 오버랩되면서 소름이 돋았죠. 지금도 말하면서 손이 떨리네요.(웃음)”
‘이요음’이란 이름 석 자가 처음 세간의 주목받은 건 2017년 국립무용단이 5년 만에 제작한 무용극 ‘리진’을 공연할 때였다. 이요음은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주역을 맡았다. 국립무용단의 간판스타인 조용진?박혜지와 파트너로 어깨를 나란히 한 무대였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한 작품이에요. 무용극이라는 건 관객에게 감정과 함께 내용을 확실히 전달해야 하는 장르라서 그 부분이 어려웠죠. 김미애?정길만 조안무 선생님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파트너와도 대화를 많이 했죠. 극에서는 파트너십이 있어야 좋은 무대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요음은 이후 곧바로 국립무용단의 대표 레퍼토리 중 하나인 ‘춤, 춘향’을 개작한 또 다른 무용극 ‘춘상’에서도 주역으로 나서면서 명실 공히 국립무용단의 ‘라이징 스타’로 자리 잡았다.
“배정혜 선생님의 ‘춤, 춘향’은 보기만 했던 작품이라 기대가 많았어요. 듀엣의 경우엔 선생님이 그려주신 큰 그림속에서 스스로 춤을 춰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더 재밌게 한 것 같아요. ‘리진’에 이어 조용진 선배와 파트너가 됐는데, 아이디어가 무척 많으세요. 집에서 연습하고 오시나 싶을 정도죠.(웃음) 선배가 리드해준 덕을 많이 봤어요.”
입단 동기인 박혜지와는 예원학교-서울예술고등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까지 선후배로 줄곧 함께해온 오래된 사이다.
“예원학교·서울예고 때는 선후배로 인사만 나누던 사이였어요. 대학에 와서 같은 공연 팀으로 활동하며 조금씩 알게 됐고, 국립무용단 인턴을 같이 하면서 점점 친해졌죠. 정단원이 되고 나선 점심도 늘 같이 먹어요. 신기할 정도로 대학 때부터 같이 선 무대가 많고, 여기서도 늘 같은 작품에 캐스팅되는 게 당연하게 생각될 정도예요. 어쩌다 떨어지면 이상하게 느껴지죠. 처음 ‘넥스트 스텝I’ 때도 갈라지니까 이상했는데 결국 ‘가무악칠채’로 합쳐졌네요.(웃음)”
지난해 현대무용수 신창호가 안무한 ‘맨 메이드’에서도 박혜지와 투톱으로 섰다. VR 디바이스를 쓰고 앞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서로 똑같은 동작을 거울처럼 구현해야 하는 고난도 작업이었다.
“신창호 선생님은 대학 때 현대무용 수업 교수님이어서 반가웠어요. 저를 기억하실지 몰라서 처음엔 인사도 못 드렸는데 다행히 기억하시더군요. 혜지 언니와 제가 쉬는 시간에도 계속 붙어 있는 걸 보시고는 둘이 친한 것 같고 분위기도 비슷해 보이니 똑같은 움직임을 해보라고 하셨어요. 워낙 같이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동작을 맞추는 건 힘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VR 디바이스를 써야 하는 건 힘들었죠. 눈을 가리고 춤춰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요. 바닥이 어디인지 감도 안 와 넘어지기도 했는데, 계속 하다 보니 신기하게 적응되더군요.”
한국춤의 기본 동작을 하나의 픽셀로 놓고 현대적인 안무로 확장해가는 신창호의 방식은 그간의 현대화 시도와는 또 다른 색깔이었다. 굳이 한국적인 요소를 끼워 넣은 언어가 아니라 현대적인 움직임을 한국 무용수들이 구사함으로써 한국적인 색깔이 자연스레 입혀지는 방식이랄까. “현대무용가들도 저마다 한국춤을 풀어내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요. 신창호 선생님은 굳이 한국적인 걸 드리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한국적인 색깔을 넣으라고 하시더군요. 한국무용수만의 색이란 게 있지 않을까 싶어요. 조안무가로 현대무용수 한 분이 오셨는데, 그분은 같은 동작을 해도 완전히 다르더군요. 저희는 어디에든 호흡을 넣어서 하니까 굳이 한국무용 동작을 하지 않아도 태가 달라요. 우리가 아무리 현대적인 움직임을 해도 한국적인 본질에서 벗어나지지 않고, 또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게 맞겠죠.”
무용수에게 풍기는 여유가 한국춤의 매력
이요음이 무용을 시작한 건 발레를 전공한 둘째 언니의 영향이다. 초등학교 때 언니가 다니던 학원에 무작정 따라나서며 처음 무용을 시작하게 됐고, 언니가 준비하던 예원학교 공연을 보러 가서 발레가 아닌 한국무용에 홀딱 반했다.
“어린 마음에 저도 예쁜 발레복을 입고 싶었는데 엄마가 미술?피아노?서예 학원만 보내셨죠. 어느 날 모든 학원 수업에 빠지고 언니를 쫓아갔어요. 소파에 앉아 구경하다가 조금씩 쫓아하는 걸 보곤 원장 선생님이 권유해서 시작하게 된 거죠. 발레와 한국무용을 같이 배웠는데, 예원학교 공연에서 한국무용 추는 언니가 어린 제 눈에도 너무 예뻐 보였어요. 그래서 당연한 듯 한국무용을 하게 됐어요.”
‘누구신지 몰라도 너무 예뻤던 언니’를 쫓아 한국무용을 전공한 그녀에게 지금의 롤모델은 ‘미애 샘’(국립무용단원 김미애)이다. ‘워너비’였던 ‘Soul, 해바라기’ 무대에서도 ‘미애 샘’ 바로 옆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소름이 끼쳤다는 그녀다. “미애 샘뿐만 아니라 스타는 많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좀 달라요. 늘 아침에 일찍 오셔서 묵묵히 좋은 에너지로 변함없이 자기관리하시는 모습을 보며 저도 저렇게 돼야지 싶어요. 이번에 부상 겪으면서 내가 그동안 자기 관리를 못했다는 반성도 많이 했거든요. 많이 움직이는 만큼 나를 돌봤어야 했는데 그게 부족하지 않았나 싶고. 한국춤에도 기교가 있지만 요즘에는 무용수에게 풍기는 여유를 보게 돼요. 하나가 비어 있거나 멈춰진 데서 보이는 건데, 그 여유는 동작이 완벽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거든요. 선배들?선생님들 보면서 이런 게 한국춤의 매력이구나 느끼게 돼요.”
부상으로 잠시 뜸했던 이요음의 모습은 3월 중순 ‘시간의 나이’를 통해 만날 수 있다. 프랑스의 국민 안무가로 꼽히는 조세 몽탈보가 국립무용단과 협업한 작품으로, 파리 투어에서도 더욱 호평받았던 공연이다. 이요음은 이 무대에서 새가 되기도 한다.
“영상에 플라밍고들이 나올 때 무대 위 무용수들도 다 같이 새가 되는데, 제가 짧게 독무를 춰요. 몽탈보는 동작을 일일이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무용수들에게 동래학춤?살풀이춤?진도북춤 같은 전통 레퍼토리를 춰보게 하고 거기서 영감을 얻는 스타일이었어요. 각자가 새라고 생각하고 움직여보라길래 팔짝팔짝 뛰었는데 그 동작 그대로 무대에 오르게 됐죠. 초연 때는 공연이 올라가기 직전까지 안무가 마무리되지 않아 걱정했는데 몽탈보는 참 여유로웠어요. 괜찮다면서. 근데 신기하게 결국 괜찮아지는 거 있죠. 공연할 때마다 조금씩 수정되고, 파리 공연에서는 반응이 훨씬 좋았어요.”
4월 덴마크?헝가리?세르비아 투어를 앞두고 있는 ‘묵향’도 해외에서 더 인기를 끄는 공연이다. “외국인들은 ‘묵향’을 보며 좋은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 같아요. 춤이 밑그림이라면 의상이 색채로 입혀졌달까요. 연출이 너무 잘된 거죠. 역시 정구호 선생님이 연출하실 ‘색동’도 기대가 많이 돼요.”
인터뷰를 마치자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신기하게 그동안에 (대화의 주요 소재였던) 박혜지와 이재화에게 전화가 와 있다며 웃는다. 국립무용단의 ‘젊은 피’를 상징하는 세 ‘절친’ 입단 동기가 뭉쳐 한국춤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갈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글 유주현 ‘중앙SUNDAY’공연 담당 기자.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사진 人, The view